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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2.15 12:36

 

2-15. 희망서점

 

젊어서는 지금의 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제법 친구도 많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곳도 꽤 있었습니다. 예전에 한 젊은 직장 동료(새로 부임한 신임 교수였습니다)로부터 꽤나 당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처럼 늙고 싶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루는 그렇게 말하는 거였습니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 것 같은데 별로 듣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우선 "너는 늙었다"는 게 싫었고, 본받을 게 없어서 무위도식하는 것을 본받겠다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냥 웃어주고 말았습니다.

잘 모르는 남들이 보면 제가 참 신관 편하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저도 한 번씩 그런 착각에 빠집니다. 이만하면 괜찮다고요.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기를 잘하고 타인과의 공감능력도 표나게 떨어지는 게 흠이지만 혼자 놀기에는 큰 부족함이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런 신세가 편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제 삶의 환경이 조성된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 사는 이들도 종종 봅니다(그러니까 그 신입교수도 그렇게 말했겠죠?).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제가 이렇게 신관 편하게 살 수 있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기본적으로 늘 노심초사하고 전전반측하는 것이 제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타고난 성격도 그러했지만 워낙 성장기 집안 사정이 난감해서 이렇게 편하게 살 것이라고는 예측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요즘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정문 앞에 있던 헌책방 희망서점건입니다.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하여 고등학교에 입학은 할 수 있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교과서책을 다 살 수가 없었습니다. 주요 과목을 제외하고는 없는 책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미술책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림그리기에 소질이 없었거든요. 할 수 없이 미술책을 사러 갔는데 주인이 턱없이 높은 가격을 불렀습니다. 미술책이 본래 좀 비싸긴 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책도 굉장히 깨끗했습니다). 깎아달라고 한 시간은 족히 졸랐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주인이 손사래를 쳤습니다. 너한테는 팔지 않겠으니 그만 가보라는 거였습니다. 일단 철수했다가 그 다음날 모른 척하고 또 갔습니다. 주인아저씨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전일보다는 훨씬 낮게 가격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서 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책이 거의 새책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술 시간에는 책이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미술선생님은 미술시간에는 그림만 그리라고 했습니다. 시험도 실기만 봤습니다. 방학숙제로 풍경화 한 점을 그리라고 했는데 자취방에서 바라보는 앞산(대구에서는 앞산이 고유명사입니다)을 온통 시커멓게 그려서 갔더니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때 그 희망서점은 다른 장소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세탁소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아귀다툼을 해가며 전혀 쓸모가 없던 미술책을 사던 그때, 후일 그 길 건너편에서, 신관 편하게 제가 이런 글이나 쓰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침마다 이 비슷한 글들을 써서 신문에도 실고 페이스북에도 올리는 게 재미있습니다. 글 쓰는 재미가 이렇게 쏠쏠할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 재미를 연장해서 작지만 실()한 유토피아적 공간 하나 만들고 가는 게 제 일생의 소원입니다. ‘내 복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그 공간을 물려줄 후계자들은 몇 명 있습니다. 최근에 다시 문을 연 검도교실도 일단 그 목적에 복속(服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씩 공간을 빌려서 쓰고 있지만 형편이 되면 전용 검도장과 문학 카페를 겸하는 공간을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거기서 레드빈 케이크(단팥붕어빵)도 굽고 문학공부도 같이 하면서 말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주기적으로 몇 년 앞이 한 번씩 보입니다. 지금 그 주기가 온 것 같습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지만요.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