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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9.25 12:21
박신자, 댄서의 순정
/이승주 (시인)
불혹의 나이에도 비밀이 없는 삶은 불행하고 애틋함이 없는 삶은 아름답지 못하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도 이제 늙었구나’ ‘세월이 참 유수와 같구나’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이 말을 무척 좋아했다. 좀 아련하게 애틋함이 있는 삶을 꿈꾸었다. 막연하게나마 내게도 애틋한 비밀 하나쯤 있는 삶을 동경했고, 기꺼이 평생 애틋함을 간직한 채 늙어가는 비련의 주인공이고자 했다. 그래서 그런지 노래도 사랑의 기쁨이나 청춘의 찬미보다는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사랑이 지나간 뒤의 슬픔이나 사모의 정한을 담은 노래가 내 성정에 더욱 와 닿았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안겨
붉은 등불 아래 오색 등불 아래
춤추는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새빨간 드레스 걸쳐 입고
넘치는 그라스에 눈물지며
비 내리는 밤도 눈 내리는 밤도
춤추는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별빛도 달빛도 잠든 밤에
외로이 들창가에 기대서서
슬픈 추억 속에 남모르게 우는
애달픈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슬픈 추억”과 “애달픈” “순정”의 순애보적인 스토리다. 왜 어떤 사연으로 그녀는 댄서가 되었나. 썸타는 것도 시간 낭비이고 모임의 자리는 갖지만 따로 만나거나 전화번호 같은 건 교환하지 않는, ‘셀소(셀프 소개팅의 준말.)’로 짝을 찾고 ‘밥터디(밥+스터디. 밥 먹을 시간에만 만나 밥만 먹고 헤어짐.)’로 청춘기를 건너는 “살코기세대”(삶에서 기름기를 쫙 뺀 세대.—동아일보 ‘토요기획 2030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를 생각한다. 갈수록 인정이 각박해지고 제 삶조차 건사하기 바쁜 오늘날 이런 순정이나 낭만, 추억이 하찮은 사치나 비웃음거리로 치부될까 저어한다. 지갑은 가벼워도 낭만과 순정만큼은 두둑했던 시절아, 이제 나도 흘러간 세대임이 틀림없구나. “울어라 색소폰아”, 다시금 그때 그 시절의 내 마음처럼.
한 사내가 있다
우직하게 땅만 팠다
한평생 우직하게 땅만 파면서도
남몰래 시의 밭도 함께 갈았다
그 사내를 알았다
눈발처럼 붐비는 제야(除夜)의 노래방에서
그 늙은 사내의 노래를 들었다
음정도 박자도
투박하게 제 삶의 방식으로 장악하면서
실한 무를 뽑아올리듯
‘댄서의 순정’을 뽑아내었다
노래에 힘줄이 굵었다
매끄러운 기교로는 못 따라가는
투박한 힘줄이었다
시도 노래도
삶과 괴리가 없었다
그날 이후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그의 노래는
전설이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들 누구도
시도 삶도 댄서의 순정인 그 앞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 안 되었다
—이승주, 「댄서의 순정」
젊은 나는, 그때 나이보다 늘 십 년쯤 뒤의 삶을 산 낙천적 염세주의자였으며 감상적(感傷的)인 로맨티스트였다. 내 머리와 가슴, 몸과 마음은 늘 이율배반적이었다. 일말의 그늘도 얹히지 않은 직선의 삶보다 구비 구비 애틋한 사연으로 굴곡진 한(恨) 많은 생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면 그로 인한 희생이나 죽음 따위도 두렵지 않다고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어쩌다 문득 노래가 그리울 때, 내가 부르고 듣고 싶은 노래는 질퍽한 비애와 애틋한 회한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노래다. 아름다운 것은 애틋한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라고 여전히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에.
오늘 다시금 이 노래를 따라부르며, 아마도 시 속의 “그 사내”는 “별빛도 달빛도 잠든 밤에 외로이 들창가에 기대서서 슬픈 추억 속에 남모르게 우는” 노래 속의 그 “애달픈 댄서”를 사랑한 바로 그 사내가 아니었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시 속의 그 사내에게 나를 투영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