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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9.17 11:59 수정일 : 2021.09.17 12:03
얼굴을 가리운
/양선규
“검도는 평생 해볼 만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처음 호면(護面)을 썼을 때였습니다. 마치 철가면 하나를 얼굴에 철썩 붙인 것 같았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완전한 고립’을 느꼈다면 지나친 엄살일까요?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철가면도 그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창을 통해서만 밖의 사물들을 어렴풋하게 구분할 수 있으며 귀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딱딱하고 무거운 것이 얼굴과 머리를 압박하면서 조여 왔습니다. 완전히 세상과 두절된 감옥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서는 커다란 죽도가 저의 목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전봇대만한 그것이 저의 머리를 퉁퉁 치고 나갔습니다. 아프다기보다는 크게 울리는 느낌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왜 이런 감옥행을 자초했을까라는 후회가 물밀 듯이 닥쳐왔습니다. 그렇게 두어 번 지옥행을 경험하고 나서 든 생각이 “검도는 평생 해볼 만한 것이다!”였습니다. 상대에 따라 죽도의 크기가 천차만별로 바뀌고 언제고 스스로 만든 감옥을 들고날 수 있으며 내 육체가 허용하는 근력과 지구력의 최대치를 매일매일 체크해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때의 생각이었습니다.
호면이 애인의 손길처럼 부드러워지고, 더울 때는 시원하고 추울 때는 따뜻한 보호구로 바뀐 다음에는 또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페르소나(사회적 체면)와 셰도우(욕망의 그늘)가 처음 들어온 생각이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본능을 발산하는 수단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허용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야수로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호면만 쓰면 무섭다”라는 말이 가끔씩 들렸습니다. 아마 제가 처음 느꼈던 공포지수가 제로에 가깝게 낮아지던 무렵이 그런 이분법이 가장 큰 위세를 떨치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철가면(호면 쓴 얼굴) 역시 내 인격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사범이 되고서도 훨씬 뒤의 일입니다. 자상하고 다정한 검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생각만 그렇습니다. 타고나면서부터 공포를 잘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무서운 선생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검도를 가르치다 보면 사람마다의 개인적인 특성들을 자주 목격합니다. 아마 군대 가서 훈련소 생활을 하던 시절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처음 겪는 힘든 상황이 사람의 감추어진 인성을 쉽게 드러나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공포 체질’이 우선 눈에 잘 띕니다. 평소에는 성격도 괄괄하고 자기주장도 꽤 강한 친구인데 호면만 쓰면 꽁무니를 뺍니다. 태도가 방어적이고 맞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는 대련 중에 아예 호면을 벗어던지는 친구도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칼이 들어올 때 숨이 콱 막히는 고통을 경험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친구는 결국 검도를 그만두었습니다. “시력이 워낙 나빠서 눈앞에 무엇인가 어른거리면 기분이 나쁘다”라는 말을 남기고 호구를 싸서 떠났습니다. 나중에 듣기로 그 친구는 자기 직장에서 제법 큰 사건의 주동자가 되어 본인 포함 여러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아마 그에게는 맨얼굴이 철가면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호면을 벗어던지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 부류는 “아는 것이 힘이다!”를 신봉하는 학구파들입니다. 보통은 입문 시에 “확실한 검도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정본이라 할 수 있는, 검도 책 한 권을 소개해 주십시오”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각종 자기 식 질문을 쏟아냅니다. “한 박자의 격살이라는 게 결국은 엇박자를 내라는 말씀이시죠?”, “책에도 적혀 있지만, 칼자루(병혁)을 덮어서 쥐라는 것은 타격 시 칼이 위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지요?”, “호흡법은 복식을 위주로 해야 되고, 공격은 상대의 들숨을 노려 쳐야 되지요?”, “나의 호흡을 들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네요?” 등등, 나름대로 ‘이치에 닿는 말’들을 자주 던집니다. 생각에 앞서는 몸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만 대개는 그 경지에 들기 전에 호구를 싸서 나갑니다. “이건 제게 안 맞는 운동입니다”라는 표정을 짓고 떠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좀 난감합니다. 책에는 언제나 좋은 말씀들이 많지만 초보자들에게는 그저 ‘말씀’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남의 집 만석지기보다 손바닥만 해도 내 집 앞 문전옥답이 소중한 것이 몸 공부의 요체입니다. 조금씩 손수 소출을 낼 수 있는 경작지를 넓혀가는 게 중요한 일입니다. 책은 그런 자작농이 되고 나서 필요한 것이고요.
오랜만에 옛날 생각을 하니 옛날에 읽었던 시 한 편이 생각납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위한 서시>라는 시입니다.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은사이신 김춘수선생님은 자신의 시 <꽃>(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못내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런 ‘의미를 전달하는 시’에서 머물기를 좋아해서는 시의 진경(眞境)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어린 마음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스무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선생님의 『의미와 무의미』를 사서 밤새 읽고 다음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에 손들고 답했습니다. 선생님은 김광균의 「추일서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고 저는 “은유가 남발되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닙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저 학생 생각이 나와 아주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저를 칭찬했습니다. 그렇게 문학으로 저를 초대하셨습니다. 선생님 표현대로라면 그렇게 저는 ‘위험한 짐승’이 되었습니다.
다시 검도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철가면(호면)을 쓰고 ‘위험한 짐승’을 자처하는 것이 검도의 큰 매력입니다. 짐승이 자기 부정(自己否定)을 통해, 마치 곰이 어두운 굴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되듯이, “스스로를 죽이는 자가 결국 다시 살게 된다.”라는 역설의 미학을 실현하는 게 검도입니다. 교검지애(交劍知愛 : 칼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알게 된다)를 실천하는 게 궁극의 목표가 되는 게 검도입니다. 참고로 검도에서 가장 높이 치는 기술은 상대의 얼굴을 베는 것입니다. 가장 멀리 있고 어려운 목표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또 저만의 의미 부여를 해 봅니다. 우리말로는 ‘머리’, 일본말로는 ‘멘(面)’인, 그 얼굴 베기의 구호(기합)는 상대의 ‘위험한 짐승’을 결정적으로 타격하겠다는 선언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칼로 당신의 낡고 헐거운 얼굴을 떨어뜨릴 테니, 당신은 가면을 벗으시오(내 덕분에!), 그래서 거듭 나시오(축복합니다!). 멘(얼굴)!, 코데(손목)!, 도(허리)!, 츠끼(찌름)! 등의 기합(타격 부위) 중에서도 단연 ‘멘(面)!’이 검도를 대변하는 기합(氣合)이 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아직도 ‘얼굴을 가리운’ 채로 살아가고 있는 제 못난 생각일 뿐입니다만.
<소설가 /대구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