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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8.28 10:33
이용의 잊혀진 계절
/이승주 시인
복현동 캠퍼스엔 꽃바람이 불어왔다. 학도호국단 군사훈련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책을 좀 보다가 저녁때쯤 도서관을 나왔다. 돌아갈 곳도 그저 막막해 도서관 옆 야외박물관 언덕에 비스듬히 앉았다가 가방을 베고 그 잔디밭에 누웠다. 아득히 멀리 서산 너머로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물기 어린 망막에 얼비치어 왠지 까닭 모를 서러움으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애틋함이었다. 이미 그때 나는 아름다운 것은 애틋하고 슬픈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철학적 인식을 터득하고 있었던 터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런 연유로 가슴이 자꾸 비워지고 있었다. 꽃이 지고 꽃이 피는 한때이거나 서산 너머로 붉게 사그라지는 또 하루의 일몰 등 이 세상 아름다운 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룰 수 없는 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스무 살 때 벌써 늙은 베르테르였던 내게 약혼자가 있는 샤를 로테를 사랑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그때는 얼마나 애틋하고 아름답게 가슴을 적시던지….
우~~~ 우~~~
우~우~ 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우~~~ 우~~~
우~우~ 우~~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슬픔을 안고 “이룰 수 없는 꿈”의 좌절 앞에 모든 형상과 색채가 증발되고 사라져 버린 하얀 길을 밤을 새워 나 혼자 걷던 ‘캠퍼스의 그 계절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캠퍼스의 은행나무 잎새에 노란 물이 들고 계절이 깊어 가면 동류(同類)의 고뇌와 방황으로 우리들은 이 노래를 다시 부르기 위해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다렸고, 그 날이 되면 어떤 결연한 의식을 치르듯 비감에 젖어 이 노래를 부르고 불렀다. 이 노래로 우리의 젊음은 하나가 되었고, 이 노래로 우리는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꿈의 상처를 달랬다.
비가 내리고 시월의 마지막 밤, 불빛에 젖은 노래가 전자오르간을 타고 흐른다. 우산도 없이 소녀들은 늦도록 노란 은행잎을 밟고 어렵사리 이별의식을 치른 처녀들은 오래 전에 잊은 옛사랑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낸다. 불혹의 어떤 주부들도 긴 스타킹을 신고 남편의 귀가 전으로 젊은 애인을 만나러 떠났다. 거리마다 술집마다 젊은이들은 상처를 덧내며 고함을 지르고 더러는 아무렇지도 않는 일들로 멱살을 잡는다. 잠적에서 돌아온 선배들은 젊음은 무한정한 낭비라고 가르치고, 빗줄기 속에서 맨주먹으로 어둠을 감당하는 후배들의 주정 전자오르간에 실려 한 번 더 높았다가 잦아진다.
―이승주, 「시월의 마지막 밤」
해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 돌아오면 가게와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들으며 우리들의 잊혀진 계절을 기억해내고 그 계절을 추억한다. 참으로 낭만이 흐르던, 잊을 수 없는 ‘잊혀진 계절’ 그 시절이었다.
☐ 이승주 :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물의 식도』 『위대한 표본책』 『내가 세우는 나라』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이 있으며, 시 창작 이론서로 『현대시창작백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