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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1.29 12:29
2-14. 사진, 사랑의 부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봅니다. 48년 전, 고등학교 졸업 무렵의 사진입니다. 교복을 입은 여섯 명의 까까머리 친구들이 앉고 서서 찍은 사진입니다. 여섯 명 중 두 명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편집위원 일동이라고 사진 밑에 적혀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앨범 편집위원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진에 있는 친구들과 며칠 동안 사진관 골방에 들어앉아 앨범 편집 작업을 했습니다. 사진관에서 일차 작업이 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모두 수작업으로 하던 때라 빠진 사진이 없는지, 행사활동 사진 중에서 어떤 것들을 추려서 뒤쪽에 실을 지만 의논하면 되었습니다. 크게 어려울 일도 없었고 시간도 많이 들 일도 없었습니다. 마침 사진관이 교명이 같았던 한 여자고등학교 앞에 있었습니다. 누구의 작업이었는지(아마 사진 속의 한 인물이었을 겁니다) 미대를 지망하던 그 학교 학생 두 명이 재능기부 형식으로 삽화 작업을 도왔습니다. 두 사람 모두 얼굴과 이름이 가물가물합니다, 그때는 상호간에 좀 설레기도 했을 겁니다만, 지금은 만난다고 해도 분명 얼굴을 못 알아 볼 것 같습니다. 아마 다시는 못 보고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다시 보지 못했으니 여생 동안도 그렇게 될 공산이 큽니다. 두 사람, 먼저 떠난 사진 속의 친구들처럼 다시는 못 볼 사람과 물건들로 세상은 가득합니다(사진 속 친구 중 두 명과는 이번 봄에 만찬을 같이 했습니다. 고위 공직에 있는 한 친구가 공관으로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이 사진 속의 친구들은 전원이 다 학생회 임원이었던 것도, 저와 아주 막역하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도 아니었습니다(제가 편집위원장으로 인선을 담당했습니다). 실제로 학생회 임원도 같이 하면서 저와 절친했던 친구는 자기가 이 사진에서 빠졌다고 굉장히 저를 타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의 인선 기준은 따로 있었습니다. 졸업앨범 가장 마지막 장에 오롯이 한 장 남을 편집위원 사진에 동기들을 대표할 수 있는 다섯 명을 골라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기준은 제 마음대로 정한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나의 친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느낌이 드는 친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명석하고, 정 많고, 도덕적이고, 인상 좋고, 베푸는 마음이 강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이 글을 다시 쓰면서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들었습니다. 그 이후 오십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십대 때 만난 이 다섯 명의 친구들보다 더 ‘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느낌’을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군데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직장생활을 해 보았지만 이 사진 속의 친구들과 같은 ‘형 같은’ 사람들은 아직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모두 그러기에는 2% 부족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물론 제 주변 사람들이 곧 저의 실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진을 찍을 때 이후로 저는 줄곧 인생의 하향곡선을 그리며 살아왔다는 게 되겠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올봄의 만찬에서 제가 이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때 제게 ‘가장 형 같았던 친구’가 정색을 하고 “무슨 소리 하노? 니가 제일 형 같았다!”라고 말해서 모두 박장대소했습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사람 보는 눈은 다 어른 못지않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흘러간 시간들을 재생하며 즐겁게 회포를 풀었습니다.
인생만사 모든 게 시간의 장난질 안에 있습니다. 시간은 지금 필요한 것 하나만 두고 모든 것을 탈색시킵니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망각의 세계로 데려 갑니다. 시간에 저항하는 길은 의식적으로(노력을 기울여)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만들며 사는 일입니다. 망각과 영원한 고립의 세계, 아마 그것이 죽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살아있다는 것은 누구나 한 발 한 발 죽음을 향해 걷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죽음은 그렇게 망각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나의 것을 자기 영토 안으로 옮깁니다.
프랑스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가 문득 어머니의 사진에서 ‘죽음’을 발견했다고 적었습니다. 빛과 시간의 정지, 특히 흑백의 명암이 주는 이미지는 죽음을 연상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이미지가 있어서 살아있는(살아있던) 것들은 더 화려합니다. 그는 죽음에 대비되는 ‘부활하는 사랑’을 사진 속에서 발견합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진은 죽음에 저항하고 사랑의 부활을 도모합니다.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찍은 이 흑백 사진이 바르트가 말한 대로 ‘죽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되고 있는지, 과연 '부활하는 사랑'의 전도사가 되고 있는지 오랜만에 보는(저에게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 사지 못했습니다. 이 사진은 한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려 준 것을 캡처한 것입니다) 사진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아직은 모든 게 뚜렷하지 않습니다. 혹여 사진 속의 인물들과 함께 한 사랑의 시간이 그닥 길지 않았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모두 대학에 들어가면서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하는(하던) 일도 정치인, 의사, 변호사, 군인, 사업가, 교수로 다 다릅니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가 사랑의 무게를 저울질 할 수 없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좀 더 두고 보면서 찬찬히 사진 속 과거의 시간들과 대화를 나누어볼 생각입니다. 시간이 하는 일들 앞에서는 차분하게 그녀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게 가장 현명한 행동일 것이니까요.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