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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26) 제4부 하지왕과 명림원지(7)

작성일 : 2021.08.10 11:32

 

대가야제국의 부활(26)  

4부 하지왕과 명림원지(7)

/김하기

 

하지왕이 명림원지에게 말했다.

하지만 박지는 아들까지 왕으로 앉힌 마당에 쉽사리 물러나겠소?”

박지의 아들 구야는 신라조차도 왕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재 최강인 고구려의 힘을 빌지 않으면 설사 무력으로 대가야를 찾는다고 해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당장 고구려로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난 와륵선생이 나와 동행했으면 좋겠소.”

하지왕께서는 혼자의 힘으로 충분히 광개토대왕을 설득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 명림가는 고구려의 명문가문이었으나 반역을 일으키다 실패해 남으로 도피해왔습니다. 그동안 저는 산채에서 우사, 모추, 수수보리와 함께 대가야 왕업의 설계도를 그리겠습니다.”

알겠소.”

하지왕은 젊은 나이에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어차피 현재 산채의 녹림병력으로는 대가야를 찾을 수 없다. 사물국이 전 병력을 동원해 돕는다고는 하나 소아성 한기도 갓 정권을 잡은 데다 비토섬에 상륙한 왜와 일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라 형식적으로 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명림원지의 말대로 광개토대왕의 책봉을 받는 것이 가장 실현가능성이 높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왕은 검바람재 산채를 떠나 고구려를 향했다.

그의 곁에는 칼을 품은 자객 구투야가 있었다.

책봉이 안 되면 암살하라? 거친 구투야의 성격을 봐서 책봉의 말을 꺼내기도 점에 품에 품은 단검을 뽑아 광개토대왕을 해하려 할 것이다. 구투야는 칼 그 자체이다. 나는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검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대왕에게 책봉을 바라는 나와 대왕을 죽이고자 벼르는 자객을 동시에 보내는 명림원지의 웅숭한 속셈을 알 수 없다.’

둘은 대가야의 우회로와 성산가야를 지나 중원으로 갔다. 아리수(한강)를 건너 평양성으로 들어가니 옛 생각이 사무치게 떠올랐다.

가을 해는 중천으로 떠올랐고, 고개를 넘자 평양 자작나무 숲의 미끈하고 흰 나무껍질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계곡과 등성이를 타고 올라온 산 향내가 물씬한 바람이 목덜미와 겨드랑이를 시원하게 씻어내고 숲속에서 지저귀는 다채로운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영마루 아래로 번성한 평양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평양은 예로부터 유서 깊은 고조선의 도읍이자 낙랑군의 군현으로 인구와 고루거각이 많고, 대동강이 서해로 열려 있어 중국과 왜와의 무역이 활발했고 시장이 번성한 곳이다.

광개토대왕은 평양을 중시해 즉위하자마자 평양성과 평양궁을 새로 중수하고 아홉 개의 절을 지었다. 평양성의 성곽과 문루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정림사를 비롯한 구사의 금당이 기러기처럼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를 듯 앉아 있었다.

하지왕은 영명사를 보면서 평양에서 왕과 질자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 저곳에서 광개토대왕에게 제왕학을 배우고 거련태자, 상희 공주, 백제의 질녀 다해, 신라의 대군 실성과 어울렸지.’

 

하지왕은 꺽감이란 아명으로 숙위궁에서 질자생활을 생활했다. 숙위궁에는 고구려의 속국과 신국에서 올라온 왕자와 볼모들이 고구려 숙위궁에 머물면서 황제를 호위하는 의장대에 편입되어 있었다. 숙위궁에는 신라의 내물마립간의 아우인 실성왕자, 백제 아신왕의 딸인 다해공주, 왜왕의 아들, 후연 모용성의 아들, 말갈, 거란, 숙신, 부여, 중국 북위의 자제들이 모여 질자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꺽감은 처음에는 고구려의 마방에 배정되어 말구종이 되었다. 말구종은 미천한 직이긴 하지만 말을 중시하는 고구려에서는 아주 중요한 자리였다. 광개토대왕은 명절 때마다 말을 검열하였고, 검열 때는 태왕과 태자, 후비빈들도 함께 찾아와 말을 구경했다. 꺽감은 왕족이 타는 말들이 탈이 없나 잘 살피고 조련하는 일을 하면서 신중함과 통솔력, 용맹무쌍함과 때를 알아차리는 분별력을 쌓아갔다.

거련 태자는 좌우에 호위무사를 거느리고 늘 중심에 선 인물이었지만 거련은 얼굴이 희고 창백했으며 몸은 마르고 병약해보였다. 그의 용모나 걸음걸이 어디에도 광개토대왕의 적자로서의 위엄과 후광이 보이지 않았으나 눈만은 총명하게 빛났다. 거련은 무골이 아니라 문약해 보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거련은 건강을 회복하고 당당하고 지혜로운 소년으로 커갔다.

고구려 공주 상희는 공주답지 않게 선 머슴애처럼 구는데다 꺽감을 오빠라고 부르면서도 마치 동생처럼 다루었다. 상희는 꺽감에게 귀한 먹거리를 곰상스럽게 챙겨주고 값비싼 선물도 했다. 하지만 상희가 자기의 수말하고 마방의 암말하고 접을 붙여 망아지를 얻자며 부랄이 덜렁덜렁한 수말을 몰고 올 때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적도 있었다.

꺽감은 백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숙위궁에 자주 놀러갔다. 거기엔 볼모로 잡혀온 백제공주 다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결이 가무잡잡하고 성격이 보리처럼 억센 상희와 달리 다해는 얼굴이 해끔하고 피부가 쌀알처럼 투명하게 비칠 정도였다. 눈이 크고 다소곳해 질자로 끌려온 남자애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꺽감도 다해를 보면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하지만 다해는 늘 거련이 차지하고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지.’

꺽감은 볼모로 잡힌 고구려 땅에서 다해 같이 이쁘고 고즈넉한 소녀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쟁을 다루는 다해의 길고 가녀린 손가락이 줄 위에 뛰놀면 꺽감의 가슴도 마구 방망이질을 하며 뛰었다. 꺽감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연주하는 하늘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했었다.

, 이 추운 고구려 땅에서 늘 찾던 가야의 따뜻한 집과 어머니의 품속을 이 쟁소리에서 느끼는구나.’

다해와 헤어질 때 꺽감에게 다가와 준비한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꺽감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얼얼했다.

 

하지왕이 구투야에게 말했다.

난 이 평양에서 태왕과 왕후, 태자와 질자들과 함께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냈소. 지금 다들 무얼 하고 있는지?”

거련태자와 태자의 누이동생 상희, 백제공주 다해와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면서 인연을 쌓은 것은 행복한 경험이었다.

하지왕은 이들의 소식에 늘 목말라했다. 거련태자는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해 언제라도 부왕의 보위직을 물려받아 거대한 고구려를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해도 질녀생활을 마치고 백제로 돌아갔다는 것을 풍문으로만 들었다.

지금은 신라왕이 된, 질자들의 맏형 실성군과의 만남은 꺽감이 고구려인이 아니라 가야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가야인이 아니라 고구려인이 되었을 것이다. 실성군은 신라로 돌아가 실성왕이 되어 낙동강 동쪽의 가야땅을 점령하고 지금은 낙동강 서쪽의 대가야마저 집어삼키고 있었다. 실성왕을 만나면 어떤 감정이 일어날까?

그러나 나름 평화로웠던 질자생활은 박지 집사의 밀고로 위기에 빠졌다. 박지는 꺽감이 소후 여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장화황후와 광개토대왕에게 알려 태왕은 왕명을 거역한 여옥과 수경, 꺽감을 죽이려고 했다.

때마침 한반도에 여가전쟁의 소용돌이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꺽감 일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처형을 유보하고 직접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남정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왕은 평양의 어린 시절을 회억하다 뚜벅 구투야에게 말했다.

구투야 두령, 지금 생각해보니 여가전쟁은 신라의 구원요청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소.”

그럼, 왜 고구려군은 남하해 가야를 짓밟고 나의 온 가족을 죽이고 저를 산적으로 만들었단 말입니까?”

하지왕이 영마루에서 평양을 내려다보며 구투야에게 말했다.

광개토대왕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기 오래 전에 이미 평양궁과 아홉 개의 절을 짓고 평양 보기군을 외곽에 배치했소. 나도 질자들과 함께 평양으로 내려왔소. 태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할 작정이었던 것이오.”

왜 광개토가 평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광개토대왕은 북방을 정벌한 뒤 한반도에서 같은 언어 같은 핏줄인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사국일통의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이었소. 그래서 신라와 백제를 굴복시킨 뒤 우리 가야마저 친 것이오.”

광개토대왕으로서는 평양이야말로 풍부한 남부의 병사와 물자를 징발해 남하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태왕은 평양 남쪽에 군사적 전진기지인 6성을 쌓고 징발한 군을 주둔시켜 언제든지 남방원정에 투입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헌데 울고 싶자 뺨맞는다고 때마침 금관가야가 일본과 손잡고 신라를 공격했고, 고구려군은 신라의 구원요청에 마지못해 부응한 것처럼 남진해와 마침내 금관가야를 점령하고 사국일통의 꿈을 이뤘던 것이다.

 

하지왕이 구투야에게 말했다.

왜와 손잡고 손쉽게 신라를 먹으려던 금관가야의 이시품왕은 광개토대왕의 함정에 빠진 것이오. 태왕이 놓은 덫에 너구리 왕이 걸린 것입니다.”

어쨌든 광개토는 금관가야와 저의 가문의 철천지원수입니다. 반드시 제가 이 단검으로 죽이겠습니다.”

구투야는 금관가야 이시품왕에게 받아 간직한 비수를 품에서 꺼냈다. 금관가야 대대로 내려온 사설도’(蛇舌刀)였다. 날선 칼끝이 뱀의 혀처럼 두 개로 갈라져 독을 바르면 마치 맹독의 뱀이 무는 것처럼 되어 절명하게 된다.

하지왕과 구투야는 평양을 지나 마침내 목적지인 국내성으로 들어왔다.

구투야는 그의 고리눈에 어린 살기가 되살아난 듯했다.

마침내 광개토의 숨결이 느껴지는군.’

하지왕은 처음 산적두목 구투야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구투야는 고리눈을 번들거리며 죽일 사람이 한 명 있다고 말했었다.

지금은 지나가는 과객들의 봇짐을 털어 먹고 살지만 당신이 타고 있는 그런 좋은 말과 여비가 마련되면 국내성으로 가 죽일 사람이 한 명 있지.”

그가 누구요?”

바로 광개토야. 그놈은 암살이 두려워 잘 때도 차례대로 한 눈은 뜨고 한 눈은 감고 잔다고 한다지?”

하지왕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암살을 두려워하는 왕이 일부러 흘린 소문이겠죠. 제가 암살이 어렵다는 건 우선 광개토왕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또한 왕은 최고의 호위무사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이오?”

언젠가 기회가 올 거야.”

헌데 이제 구투야에겐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고구려 도읍 국내성의 왕궁인 환도성은 늦가을 비에 스산하게 젖어 있었다. 국내성은 거대한 위용과는 달리 국읍은 광개토대왕의 병 때문에 큰 근심에 잠겨 있었다. 동북아를 칼과 말로 호령하던 태왕은 원인모를 병에 걸려 몇 달 째 밥도 먹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비에 젖은 까마귀떼가 성벽에 줄지어 앉아 까악까악 울고 있었다.

태왕과 고구려 병사들이 가는 곳마다 태양의 광휘를 번쩍이며 승전보를 알리던 국조 까마귀가 흉조가 되어 국내성은 까마귀의 소리로 가득 찼다.

, 삼족오의 눈부신 날개 짓이 그립구나.’

신과 같이 사해에 군림했던 태왕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시의가 침과 뜸을 놓고 내약서 의원이 탕약을 끓여왔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그가 싫어했던 천녀를 불러 치병 굿판까지 벌였으나 오히려 병은 더욱 위중해졌다.

광개토왕은 마지막이 온 것을 실감했다.

 

광개토대왕이 누워 있는 침전에 거련 태자가 들어왔다. 거련의 좌우에는 장화왕후와 상희공주가 시립해 있었다. 음식을 넘기지 못해 들피져 침상에 누운 부왕 앞에 선 거련의 풍모는 당당했다.

태왕이 거련에게 말했다.

아들아, 나를 좀 일으켜다오.”

, 아바마마.”

거련은 침상 등받이에 베개를 받히고 비스듬히 앉혔다. 빗지 못한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나를 일으키는 네 손에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아바마마께서 젊으실 때 비하면 전 여전히 약골입니다.”

힘을 아껴야 하느니라. 난 이른 나이에 청청한 기운을 전쟁터에서 탕진했다.”

태왕은 불혹에 미치지도 못하는 나이 서른아홉에 병상에 자리보전하고 말았던 것이다.

거련이 어려서 처방약을 먹여도 아이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고 밥을 먹지 못하고 죽어갈 때 태왕은 말했었다.

거련아, 구수한 밥 냄새, 국 냄새가 나지 않느냐. 한 숟갈만이라도 먹어보지 않겠나. 이 냄새를 맡고 멀리서 골목강아지 주막강아지까지 뛰어오는데 너는 어찌 밥을 외면하느냐.”

헌데 지금은 오히려 거련이 아버지에게 미음이라도 한 술 들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한 세대가 가면 새로운 세대가 물려받는 것이 자연과 역사의 이치다. 천하를 호령하던 국강상광개토호태왕도 기름이 말라버린 밀초 심지처럼 까무룩하게 꺼져가고 있었다. 반면 청년 거련은 동산에 떠오르는 해처럼 얼굴에 붉은 광채가 나고 눈빛이 옥구슬처럼 반짝였다.

태왕이 거련에게 말했다.

아바마마, 힘을 내셔야 합니다. 반드시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실 겁니다.”

태왕이 거련에게 말했다.

아니다.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천문박사, 시의, 약의원, 천녀들까지 여러 가지 감언으로 멀지 않아 자리를 떨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내 병을 잘 안다. 전쟁터에서 많은 젊은 병사들이 나와 같은 역병에 걸려 죽었지.”

태왕의 목소리는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위엄은 있었다.

거련아, 내가 죽으면 너는 슬퍼서 울겠지. 하지만 친구가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진실되지만 애비가 죽을 때는 울고 난 후 뒤에서 몰래 웃게 되지. 왜냐하면 애비로부터 가장권과 재산을 물려받게 되기 때문이지. 특히 왕권과 고구려 천하를 물려받게 되는 너의 웃음은 주체할 수 없을 거야.”

장화왕후가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웃음을 주체할 수 없다니오? 아들에게 너무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태왕이 힘없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도 부왕이 돌아가셨을 때 슬퍼 울었지만 측간에 가서는 웃었지.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고구려를 움직여보겠다는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지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