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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7.17 11:14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시가 있는 가요 산책 (10)
패티김, 이별
스위치를 누른다. 시디에서 패티김의 「이별」이 흐른다. 퇴근길 나의 애마는 차 안 가득 선율을 담고 밀양강변을 달린다. 시종 풀었다 휘감으며 졸였다 놓았다 가락을 압도하는 패티김의 자재롭고도 애틋한 음색. 귀와 마음은 금방 노래의 선율을 따라 노을 진 잔물결이 된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 거야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 ~♬ ~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의 주체는 냉정한 그 사람인가 아니면 노래의 화자인가. 여기서 그렇게 잊지 못할 정도로 뜨겁게 사랑한 그 사람을 “냉정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이 정말로 냉정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아마도 틀림없이 그에게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어떤 더 큰 운명이나 시대가 그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소식조차 전하게 할 수 없는, 그 사람도 틀림없이 둥근달을 쳐다보면서도 나를 생각하고 자다가 깨어서도 나를 잊지 못하고 생각하고 있을 (행여 이 글을 읽을 J도 그렇지 않은가.) 그 사람에 대한 투정이다. 주체가 냉정한 그 사람이라면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는 화자로서는 그렇게 믿고 싶은 추측과 바람이요, 주체가 노래의 화자라면 그것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 대한 상황의 가정이다.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는 주체는 일차적으로는 “냉정한 사람”이겠으나, 그 어느 한편이 아니라 쌍방 모두라 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우리의 헤어짐에는 그 사람의 잘못뿐만 아니라 나의 잘못도 전적으로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후회하게 될 “지난날”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과거시점이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나의 반성과 자책으로 아파올 ‘미래시점에서의 지난날’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부르면 부를수록 애틋함 속에 스며든 또 다른 겹의 애틋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이다.
서로는 그렇게도 사랑했으면서도 헤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이별은, “둥근달”―둥근달이야말로 “그날 밤 그 언약을” 기억 속에서 재생시키는 플레이어―을 쳐다보며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 그 헤어짐이 곧 “후회”로 가슴을 적셔올 것이므로, 비록 몸은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다 할지라도 “바다 건너 두 마음”만은 ‘멀어진’ 것이 아니다. 단지 ‘떨어진’ 것일 뿐이므로 나도 냉정한 그 사람도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세월만큼 야속하고 무정한 것도 없어 그 세월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거두어간다 하여도, 세월 앞에 우리가 ‘그리움’으로 살아 견딤으로써 세월에 굴복하지 않은 한 그 세월조차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마저는 거두진 못하지 않았던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윤동주, 「편지」
언외유의(言外有意)라. 아프다.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아프고 또 아프다. 표현된 의미 너머의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립다”는 말보다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란 말이 더 사무치리라.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 진정 못 잊는다는 말”보다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란 말이,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 행여 울었다는 말”보다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사무치리라.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란 말,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란 말은 이제는 지나간 추억일 뿐이라는 말이 아니다. 기억의 심층에 이미 화석으로 굳은 추억일 뿐이란 말이 아니다.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란 말은 여전히 그리워서 흰 편지지에 “그립다고 써보니” 더욱 그리움이 눈물로 북받쳐 말을 이을 수 없다는 말. 언외유의를 아는 사람은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란 말이 진정 잊지 못하고 긴 밤을 울음으로 지샌다는 말보다 더 아프다는 걸 알리라. 패티김에 젖고 윤동주에 젖고 내 지나온 푸른 봄날에 젖는 동안 나의 애마는 어느새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오늘나는 이 노래만으로도 애틋하면서도 행복하였다 하겠다. <이승주 시인 하루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