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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7.03 10:38
나훈아, 찻집의 고독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누군가를 기다릴 때 일어나는 미묘한 심리를 난해한 시적 기교나 수사적 표현 없이 잘 보여준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일 분 일 초 기다리는 순간은 물리적으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심리적으로는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주 먼 데서” “천천히 오고 있는” 것 같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오고 있는 것처럼 아주 ‘오래’이게 느껴진다. 그래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다음에는 아마도 틀림없이 “너일 것이었다가 / 다시 문이 닫”힐 때,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내 마음은 그 사람에게로 간다.
지금은 레스토랑이지만, 그때는 다방이었다. 스물네 살, 대학을 졸업하던 해 삼 월 바로 나는 울산의 남고에 초임발령을 받았다. 학교 앞에 방을 얻어놓고 식사는 인근 식당에서 해결했다. 학교에는 나 말고도 총각이 서넛 더 있어 자주 같이 어울렸다. 내가 제일 막내였다. 더러 저녁을 같은 식당에서 먹게 될 때면 식당 건너편에 새로 지은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새로 온 다방아가씨는 그다지 커지 않은 몸매가 맵시가 있었고 예뻤다. 이름을 연화라고 했다. 우리가 서로 조금 친해졌을 때 아가씨는 전에 배구선수를 조금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생활을 아주 잠깐만 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어쩌다가도 쓸쓸해 보인 적은 없었다. 눈매가 깊고 선했으며 상냥했다. 타향객지에서 별다른 할 일이 없을 때 그냥 어쩌다가는 나 혼자 가서 잠깐씩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친해졌고 손님이 없는 저녁때면 아가씨가 끓여준 삼계탕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녀는 밤 열두 시쯤 일을 마쳤다.
어느 날 그녀가 그 다방이 아니고 시내의 다른 다방에서 만자자고 하였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하였다. 자기는 일 마치는 대로 바로 거기로 가겠다고 하였다. 밤 열두 시쯤 태화교를 건널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손님들이 다 돌아간 텅 빈 다방에서 기다렸다. 괜히 설레였다. 열두 시,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났다. 「찻집의 고독」이 멀어지고 있었다. 이십 분이 지나고 석 달 같은 삼십 분이 지났다.
그 다방에 들어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
약속 시간 흘러갔어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싸늘하게 식은 찻잔에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
아 ~ 사랑이란 이렇게도
애가 타도록 괴로운 것이라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가슴 조이며 기다려요
아 ~ 사랑이란 이렇게도
애가 타도록 괴로운 것이라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가슴 조이며 기다려요
모름지기 세상사가 그러하듯 사랑에도 빛과 그늘이 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그 님을 만난다는 설렘과 기쁨으로 이 층의 다방 계단을 오를 때 내 발걸음이 마구 뛰고 내 발걸음보다 앞서 내 가슴이 더욱 쿵쿵 뛰어 다방을 들어설 때, 내가 먼저 도착했으면 그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비단보다 진주보다 꿈결보다 더 귀한 나만 아는 감미로움일 때, 그때가 사랑의 빛. 그러다가 그것도 잠시 그 설렘과 기쁨이 “찻잔”처럼 싸늘히 식으면 그때는 사랑의 그늘. 사랑의 고독과 슬픔. 그때 사랑의 그늘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가슴 조이며” “이렇게도 애가 타도록” 괴로움으로 우리의 가슴 속을 파고든다.
맑은 찻물 속에
어떤 봄기운 하나가 건네준
꽃잎 연서 한 장 비치네.
바람의 미향(微香)과
새순 위의 햇살의 재잘거림
깊은 눈우물에서 길어 올린 말씀
따뜻하게 우러난 차를 마시며
천천히
꽃잎 연서를 읽는 동안
몸속으로
따뜻한 꽃 한 송이
꽃창(窓)이 열리네.
―이승주, 「따뜻한 꽃」
나는 지금 커피 대신 녹차를 마시며 지금까지 사연도 모른 채 헤어졌던 그 아가씨를 기다린다. 지금은 헐리고 없는 그 옛날의 다방에서 「찻집의 고독」을 들으며. <이승주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