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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4.01.15 01:28
2-13. 복음이 되려면
어릴 때의 궁금증 중의 하나가 ‘복음(福音, the gospel)’이라는 말의 의미와 그것의 전승 방식이었습니다. 우선 왜 그 내용이 복음이라고 불리어야 하는지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앞부분에 나오는 네 복음(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존재도 좀 이상했습니다. 어린 독자가 보기에 그 네 복음은 거의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세상에 나타나서 “회개하라!”고 외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인데 그 내용을 네 번씩 반복해야 될 필연적인 이유가 어디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교회에서 같은 복음서라도 마태, 마가, 누가와 요한이 기록 관점과 디테일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배우긴 했습니다만 그 의문을 다 해소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각 복음서마다 기자(記者)의 강조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경전이라면 하나로 통일된 율법을 전해야지 이것저것 서로 배치되거나 차이 나는 것을 실어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게 그때 제 생각이었습니다. 얼마 전 그런 제 의문에 해답을 주는 책이 나와서 옮겨 봅니다.
루가가 역사적 현실에 조금 더 집중했다면, 마태오는 현실을 보는 눈과 마음에 좀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루가가 사회윤리에 관심이 많은 역사가라면 마태오는 개인윤리에 좀더 관심이 많은 철학자다. 크게 보아, 「루가」가 「맹자(孟子)」라면 「마태오」는 「논어(論語)」에 비할까. 그러면 「요한복음」은 「노자(老子)」나 「장자(莊子)」 정도가 되겠다. 역사적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 현실을 지그시 관조하는 책이니 말이다. 가장 간결하고 꾸밈없는 「마르코」는 「사기(史記)」 정도의 생생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람마다 특별히 선호하는 복음이 있으니 그 복음의 자리와 성격을 각자 정확히 알 일이다.
연전(年前)에도 『예수평전』(조철수, 2010)이라는 두꺼운 책을 사서 어릴 때의 그 궁금증을 한 번 해소해 보려고 욕심을 부려 본 적이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전문적인 내용들이라 책 읽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좀 진도가 나갑니다. 제 안의 어린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상하게 가르쳐 줍니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우리 말 번역(해석)에 대한 설명도 친근합니다. 마르코는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한 것을 마태오가 거기다 ‘마음이’를 덧붙여서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적 빈곤 상황에 심리적 빈곤 상황까지 아우를 수 있게 했다는 설명이 반가웠습니다(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물론 복음이 ‘아는 것’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들 것이니”라는 산상수훈의 첫 마디는 언제 들어도 푸근하고 친근합니다. 제가 나이 들어 다시 종교를 찾았을 때 저는 그 말씀을 “자기(의 욕심)를 버리고 신의 품에 안긴 자(타인을 위해 사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성가에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때가 아마 제가 살아오던 중 가장 ‘마음이 가난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복음이 들린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그것이 ‘구원의 진실’을 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복음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 어떤 인위적인 조작과 종합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 개입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복음인 것을 아는 것은 듣고 배우거나 보고 공부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때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뿐인 율법’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것들을 사랑할 때입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