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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6.25 02:14 수정일 : 2021.07.02 12:04
싸움의 기술①
/양선규
장자에는 여러 편의 우화가 등장합니다. 널리 알려진 것에 포정(庖丁), 윤편(輪扁), 도척(盜跖), 목계(木鷄), 산목(山木), 설검(說劍)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주로 치자(治者)의 도리나 은둔하며 무위하는 삶의 가치 등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장자식 표현에 다르면 그것들은 모두 ‘양생(養生)의 도’를 밝히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우화는 외편 「달생(達生)」에 등장하는 ‘매미 잡는 법’과 ‘싸움닭 키우는 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의 제목인 ‘싸움의 기술(技術)’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중니(仲尼)가 초나라로 가다가 숲 속을 통과하는데 한 꼽추가 마치 줍듯이 쉽게 매미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중니가 물었다. “당신은 솜씨가 좋군요. 비결이 있나요?” 꼽추가 대답했다. “비결이 있죠. 대여섯 달 동안 장대 끝에 공을 두 개 겹쳐놓고 떨어지지 않게 되면 매미를 잡을 만하지요. 실패할 때가 적게 됩니다. 공 세 개를 겹쳐놓고 떨어지지 않게 되면 실패는 열 번에 한 번 정돕니다. 공 다섯 개를 겹쳐놓고 떨어지지 않게 되면 마치 줍듯이 잡게 된다오. 내 몸가짐은 말뚝처럼 꼼짝 않고 팔의 동작은 마른 나뭇가지와 같이 움직이지 않소. 천지의 드넓음도 만물의 다양함도 아랑곳없이 다만 매미의 날개짓만이 포착될 뿐이오. 몸과 팔을 꼼짝 않은 채 오직 그것에만 마음을 쏟을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잡지 못할 리가 있겠소!”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뜻을 한데 모아 마음이 흩어지지 않으면 곧 신과 같아진다지만, 그것은 저 꼽추 노인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기성자(紀渻子)가 왕을 위해 싸움닭을 키웠다. 열흘이 되어 왕이 물었다. “닭이 이제 싸울 수 있겠나?” “아직 안 됩니다. 지금은 공연히 허세를 부리며 제 기운만 믿고 있습니다.”하고 기성자는 대답했다. 또 열흘이 지나고서 왕이 물었다. 기성자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됩니다.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모습에 당장에라도 덤벼들 태세입니다.” 또 열흘이 지났다. 왕이 묻자 기성자가 대답했다. “아직 안 됩니다. 상대를 노려보며 성을 냅니다.” 다시 열흘이 지났을 때 왕이 묻자 비로소 기성자가 말했다. “이젠 됐습니다. 상대가 울음소리를 내도 태도에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그 덕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다른 닭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장자』 외편, 「달생(達生)」, 안동림 역주, 『莊子』, 및 조관희 역해 『莊子』 참조]
위의 이야기들은 「달생(達生)」 편의 주제가 ‘삶에 통달하기’이니만큼 그에 적합한 화소(話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심망아(無心忘我)의 부단한 수련을 통해 신기(神技)의 경지에 오르는 지인(至人)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통한 매미 잡이’와 ‘목계(木鷄)의 경지에 오른 싸움닭’이 우의(寓意)하는 것은 천지자연에 순응하여 모든 인지(人智, 人知)를 벗어난 무위의 삶을 영위하라는 장자의 가르침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무위(無爲)가 아니라 유위(有爲)의 지극한 경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생을 능수능란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우화로 이해가 됩니다. 부단하게 노력해서 터득한 ‘무위(無爲)의 경지’로 유위(有爲)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교훈을 전달합니다. ‘매미와 닭’은 그런 보편적인 ‘달생(達生)’의 방법론을 위해 동원된 보조관념입니다. 신기(神技)에 이르는 이런저런 과정도 그러한 보편이론을 강조하기 위한 '재미있게 전달하려는 차원'의 스토리텔링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무도를 통한 자기와의 싸움’에 중독된 자들(특히 劍道家들)에게는 이 두 이야기가 그와 같은 보편이론을 강조하기 위한 우화적 서사로만 읽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화가 아니라 직설(直說)적인 '싸움의 기술'로 읽힙니다. 정중동의 움직임을 그 지극한 경지로 밀어붙여서 신기(神技)의 매미 잡기를 성취한다는 것이나 부단한 수련으로 무형의 위세(威勢)를 갖추어 싸우기도 전에 이미 상대를 제압해낸다는 싸움닭 이야기가 그냥 비유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만든 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가 말하는 그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 곧이곧대로, 실전에 있어서의 ‘싸움의 기술(技術)’에 요구되는 요점 그 자체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몸가짐은 말뚝처럼 꼼짝 않고 팔의 동작은 마른 나뭇가지와 같이 움직이지 않소. 천지의 드넓음도 만물의 다양함도 아랑곳없이 다만 매미의 날개짓만이 포착될 뿐이오. 몸과 팔을 꼼짝 않은 채 오직 그것에만 마음을 쏟을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잡지 못할 리가 있겠소!”라고 말하는 구루자(痀僂者, 곱사등이)는 필시 정중동(靜中動), 후발선지(後發先至)의 경지에 이른 검술의 고수(高手)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이미 그가 상당한 수련을 거친 이라는 걸 증명합니다. 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무도 수련 과정에서 터득하는 ‘싸움의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그 덕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다른 닭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도망쳐 버립니다.”라는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앞의 여러 단계, 허세를 부리고, 성급하게 반응하고, 공격성을 다스리지 못하는 단계를 넘어서야만 얻을 수 있는 태산부동(泰山不動)의 자세를 그 대목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초보 검객 시절 선생님들의 죽도가 마치 전봇대만큼 크게 보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등장인물들의 무기가 '엄청난 크기'로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묘사되는 것처럼(대표적인 것이 ‘드래곤볼’이나 ‘이누야샤’ 같은 것일 겁니다), 처음 호구를 입고 칼을 맞대는 순간 상대방의 무기가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런 환각을 경험하면서 "아, 이건 평생 해볼 만한 것이다!"’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물체를 그렇게 감각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은 그 공부가 '필생의 공부'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초발심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제 상대의 칼이 실측(實測) 이상으로 크게 보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여전히 빡센 상대를 만나면 심한 압박감을 받고 칼을 주고받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목계(木鷄)에 더 가까운지를 겨루는 경우는 왕왕 있습니다. 지나치게 목계연하는 이들과 만나면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 짜증만 다스릴 수 있으면 한 고비 또 넘기는 것이라 여깁니다. <소설가 /대구교육대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