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22) 제4부 하지왕과 명림원지(3)

작성일 : 2021.06.21 01:51 수정일 : 2021.06.21 01:55

대가야제국의 부활(22)

4부 하지왕과 명림원지(3)

/김하기

 

비 때문에 노역이 없는 뇌옥의 방들은 텁석부리 방과 건넌방들이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떠들썩한데 명림원지와 수수보리, 하지왕과 우사, 모추는 목창살을 사이에 두고 역사와 대업에 관해 진지한 논쟁을 하고 있었다.

우사는 명림원지와 대업을 이야기하다 역사에 대해 쟁론을 벌였다. 태사령 우사는 역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되어야 하며 한 점의 오류도 없어야 한다는 철저한 실증주의 입장인 반면 명림원지는 역사는 승자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 날조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운명이라는 입장이었다.

우사가 명림원지에게 말했다.

왜 명림선생이 그렇게 종작없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지 그 원인을 알겠소. 역사를 보는 눈이 비뚤어졌기 때문이오.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통일한 것은 한무제가 사방의 오랑캐를 무찌르고 천하에서 가장 큰 대제국을 건설해 대업을 이룬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오. 가야왕국과 신라 김씨왕조의 역사가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김일제 후손에서 시작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오. 헌데 이런 엄연한 토대를 무시하고 자기의 허황된 생각으로 거대한 궁궐을 짓고 그 안에다 위대한 왕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신기루이고 사상누각일 뿐이오. 한 마디로 말하면 사기요.”

우사 선생은 순진한 데가 있소. 태사령과 같은 몇몇 역사가를 제외하고 역사를 기술하는 자는 모두 아첨배이자 사기꾼이요. 난 진황한무의 업적과 가야와 신라의 왕조가 김일제의 후사임을 부인한 적은 없소. 거기에 날조와 왜곡이 과장과 축소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사실과 증거를 생명으로 여기는 태사령이 더 잘 알 터이요. 다만 역사적 사실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골자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것입니다. 나의 눈에는 진시황제는 한갓 어릿광대에 불과하고 한무제는 꼭두각시놀음에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허허, 갈수록 태산이군요. 천하에 명림선생이 가장 잘 났소이다. 진황한무조차도 바보 취급을 하다니. 역사를 말할 때는 뜬 구름에 발을 딛고 말하지 말고 근거를 대고 말하시오. 탄탄한 근거를!”

우사가 준엄하게 명림원지를 꾸짖었다.

명림원지가 쥐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으로 뇌옥의 죄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근거는 바로 여기 뇌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과 저 멀리 검바람재에 소굴을 틀고 있는 산적떼들과 바깥 저잣거리를 오가는 필부필부들이오. 나의 탄탄한 근거는 바로 민초인 것이오.”

민초라? 천하고 힘없는 백성이 무슨 근거가 되기에 그렇게 말하는 거요?”

그게 그동안 당신이 지금까지 벼루에 갈아왔던 먹물의 한계요. 진황한무는 민초의 장단에 어릿광대 칼춤을 추다 장단이 뚝 끊어지니 비 맞은 흙인형처럼 허물어진 거요.”

우사가 반박하려고 하자 옆에서 경청하고 있던 하지왕이 나서며 말했다.

와륵선생이 말씀이 맞습니다. 맹자도 말씀하셨죠. 신하의 근본은 왕이요 왕의 근본은 하늘이요 하늘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하지왕은 명림원지의 변설이 황당무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지만 그가 지향하고 노리는 핵은 보석처럼 단단하고 선명하다고 생각했다.

명림원지가 앞서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에겐 먼별을 바라보는 관측보다 우선 이 츱츱하고 퀴퀴한 뇌옥을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관찰이 필요하다.’

하지왕은 명림원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쥐상에 곧추 서지 못한 등뼈로 인해 몸은 구부정하고 깡마른 체구로 외모는 볼품없다. 석공스님으로부터 소개를 받았을 때부터 하지왕은 명림원지를 옥골선풍에 학창선을 들었다는 제갈공명 상을 떠올리며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의 변설은 듣기에 휘황하고 어눌하여 소진장의나 태사령 우사보다도 못하다. 앞으로 좀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바둑판 전체를 읽은 큰 그림에는 강하나 돌과 돌이 부딪치는 수 싸움에는 약한 듯하다.

하지만 명림원지는 고구려의 뼈대가 있는 가문의 출신이다. 그의 중시조 명림답부는 어떤 사람인가? 하지왕은 고구려의 질자로 있을 때 태학의 박사로부터 고구려의 무수한 위인들의 업적과 행적에 대해 끊임없이 배우고 암송했다. 동명성왕, 부분노, 태조왕, 명림답부, 고국천왕, 을파소, 부분노, 두노, 유유, 밀우, 창조리, 을불(우불, 을불리라고도 한다. 고구려 15대왕 미천왕의 아명으로 그는 소금장수에서 창조리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다.), 소수림왕 등 별 같은 위인들 중에서 명림답부는 가장 뛰어난 영웅이었다.

명림답부는 고구려 7대왕 차대왕 때 연나부 출신의 강직하고 지혜로운 신하였다. 차대왕은 왕이 되기 전에는 한나라와 전쟁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워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하지만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제거했고, 선대왕의 아들인 막근과 막덕도 죽였다. 정적을 제거한 차대왕은 황음무도한 패도의 길로 갔다. 명림답부는 이런 왕에게 충언을 일삼아 미운 털이 박혀 유배를 여러 번 갔다. 게다가 가장 미약한 연나부 출신이라 차대왕 밑에서 20년을 봉직했으나 그의 관직은 고작 10관등 중 9위인 조위에 머물고 있었다.

왕의 패도정치로 민심은 떠나 있었고, 일식과 지진, 기상이변 등 자연재해마저 일어나자 너도나도 왕이 바뀌어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명림답부도 은밀하게 왕권 교체라는 큰 뜻을 품었다. 하지만 명림답부가 정변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나 한미한 존재였다. 조위라는 미관말직과 고구려 5부인 계루부, 관나부, 환나부, 소노부, 연나부 중에서 유일하게 권력에서 배제된 연나부 출신인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기로 계획하고 착착 실행에 옮겼다. 그는 조위직이 갈 수 있는 최고의 보직인 궁궐 호위부대의 우두머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권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연나부 사람들을 자기 밑의 호위무사로 속속들이 충원했다. 그 중에는 연나부의 부족장인 상가, 패자도 있었다.

명림답부는 준비가 완료되자 차대왕이 주색에 절어있던 밤에 호위부대를 이끌고 야습해 직접 자기의 칼로 왕을 베어 죽였다. 명림답부는 왕을 죽인 뒤 곧장 왕궁을 장악하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9관등 조의에 불과한 그가 권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공을 들인 연나부의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림답부는 차대왕을 죽인 뒤 벌어진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차대왕 때 항시 살해의 위협에 시달려온 왕의 동생, 백고를 새로운 왕으로 염두에 두고 좌보 어지류에게 모든 일을 위임했다. 어지류는 문무백관 소집해 백고를 왕으로 선정했으니 백고가 고구려 8대 신대왕이었다.

신대왕은 왕위에 오른 후, 국상의 관직을 새로 만들어 명림답부를 국상으로 삼아 국무를 관할하게 하고 양맥 부락을 식읍으로 주었다. 신설된 국상이란 관직은 이전까지 고구려 최고 관직인 좌보와 우보를 합친 것이어서 명림답부는 왕에 버금가는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덩달아 그는 연나부의 부족장인 패자가 되어 나라 안팎의 병마를 맡았으니 연나부는 5부중 가장 강력한 부족이 되었다.

여기서 명림답부의 삶이 끝났다면 고구려의 사가나 하지왕도 명림답부를 그저 하극상을 일으킨 권력욕에 가득한 자로만 평가했을 것이다.

그의 타고난 지략은 고구려와 후한과의 전쟁에서 나타났다. 후한은 고구려의 왕조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신대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응책을 강구했다.

대신들은 어찌하면 좋겠소? 나가서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화의를 청하느냐 갈림길에 놓여 있소.”

당시 고구려는 후한과 맞설 상황이 아니었으나 대신들은 고구려의 상무정신에 의탁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마, 후한의 병사들이 비록 많다 하나 우리가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겁하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화의를 하더라도 수시로 우리를 공격해 괴롭히며 상전 노릇을 할 것입니다. 놈들의 개가 되느니 당장 군사를 내어 요동 벌로 나아가 초전에 적의 주력부대를 까부수어야 합니다.”

대소신료들도 이구동성으로 적과 맞서 싸우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왕이 조당에서 이상하게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국상 명림답부에게 물었다.

경은 아무런 말이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소신은 저들과 의견이 다릅니다.”

명림답부의 말에 문무백관들이 술렁이고 웅성거렸다.

왕이 재차 물었다.

그러면 화의를 하자는 것이오?”

소신의 생각은 싸움도 화의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자 문무백관들이 아까보다 더 웅성거리며 명림답부를 예전엔 용감했으나 이제는 노쇠한 말이라며 비방하기 시작했다.

왕이 명림답부에게 말했다.

말을 모호하게 하시니 국상답지 않구려. 싸움도 화의도 하지 말자니 무슨 묘안이라도 있는 게요?”

국상 명림답부가 입을 열었다.

마마, 국가의 존망이 조당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이 무거운 결정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리이까. 지금 후한은 나라가 크고 병사가 많은데다 질풍노도로 달려와 사기가 충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병사는 적고 나라는 어수선합니다. 섣불리 나가 싸워 패하기라도 하면 한순간에 추모대왕이 세운 고구려 사직이 멸망하고 맙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의 말은 맞소. 하지만 싸우지도 않고 화의도 하지 말자니 그냥 가만히 있자는 것이오?”

마마, 그러하옵니다.”

그러자 문무백관들이 혀끝을 차거나 끌탕을 치며 명림답부를 비난했다.

명림답부가 말했다.

요동 벌로 달려가지 말고 성을 지키며 방어하자는 것입니다. 군사가 많으면 나아가 싸우고, 적으면 마땅히 지키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적은 많은 군대를 이끌고 천리 원정을 왔으므로 우리에게 다가올수록 보급로는 뱀처럼 길어집니다. 그러면 양식 운반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적은 지치게 됩니다.”

“......”

다만 우리가 요동 벌에는 기마대를 보내지 말고 농부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전쟁에 농부를 내보내라니.”

성벽은 높게 쌓고, 들판은 비워야 합니다.(건벽청야(建壁淸野): 손자병법에 나온 전술개념으로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한 인물로 612년 수나라 30만 대군을 살수대첩에서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을 말하는데, 을지문덕과 관련된 기록에 청야라는 말은 없다. 을지문덕보다 먼저 청야 작전을 실행한 인물이 바로 명림답부였다. 그의 청야작전이 훗날 을지문덕의 작전 수행에 모델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농부들을 들판을 보내 낫으로 들의 곡식들을 모두 베어 성안으로 거둬들이면 적은 굶주리고 발붙일 곳이 없어 지쳐 철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군사를 내보내 싸우면 적들을 크게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것 좋은 계책이오. 대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대신들은 무조건 나가서 싸우자고만 할 뿐 명림답부의 전술만한 것을 내놓지 못했으므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왕은 명림답부의 작전에 동의하고 그에게 병권 일체를 맡겼다.

고구려는 명립답부의 지휘 하에 후한의 대군과 맞서 싸우지 않고, 성에 들어가 철저하게 지키기를 거듭했다. 다만 소수의 척후병을 내어 유인하고 별동대로 기습, 매복을 해 적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후한의 군사들은 장거리 원정으로 인해 피로감이 쌓여갔고, 차츰 식량마저 부족해져 사기가 떨어진데다 고구려의 별동대가 밤낮으로 등에처럼 괴롭히니 견디지를 못하였다. 지쳐 떨어진 후한의 대군은 번번이 싸워보지도 못한 채 패잔병이 되어 철군하기 시작했다.

명림답부를 이때를 노렸다. 그는 자신이 직접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철수하는 후한의 군대를 뒤쫓아 좌원이란 곳에서 전투를 벌여 적을 전멸시켰다. 좌원에서 후한의 군대는 단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대패했다. 신대왕은 나라를 구한 명림답부를 맞이하기 위해 십리 밖으로 나와 환영했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의 땅을 식읍으로 주었다.

 

후한과의 전쟁 승리로 고구려는 동북아의 패자가 되어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명림답부는 국가적 영웅이 됨과 동시에 부와 권력도 자연히 뒤따르게 되었다. 그가 후연의 군대를 전멸시킨 좌원과 질산 일대를 식읍으로 받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자신의 부족 연나부를 고구려왕실과 혼인을 통해 권력을 강화시켰다. 연나부 출신 우소의 딸은 신대왕의 장남인 남무와 결혼했고, 남무는 9대 고국천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대대로 왕비는 연나부출신이었다. 산상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까지 모두 연나부 출신 왕비를 배출했다. 명립답부가 권력을 쥔 이후로, 백년 이상 연나부는 거듭해서 왕비를 배출하여 왕실인 계루부에 버금가는 큰 세력을 갖게 되었다. 반면 명림답부가 시해한 차대왕을 지지했던 관나부와 환나부는 급격히 몰락해서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명림답부는 언제든 폭군은 제거할 수 있다는 왕권교체의 정당성을 부여했고, 최초의 국상제도 도입을 통해 국무체제를 정비했으며, 외적을 물리치고 그 병법마저 제시함으로써 후대 국가방위의 전범이 되었다. 고구려는 그의 등장 전후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구도가 크게 바뀌게 되었다.

명림답부는 그의 가문에도 영향력을 끼쳐, 후손인 명림어수는 동천왕 시절에 국상이 되었고, 명림홀도는 중천왕의 사위가 되었다.

하지왕은 고구려 질자 시절, 태학에서 박사로부터 고구려 역사를 배우면서 명림답부야말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스로 몸을 일으켜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르고 나라를 구한 (사국사국(四國):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를 말한다.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게 멸망하기까지 한반도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였다.) 최고의 전략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말은 허황된 듯하고 외모는 볼품없어도 명림답부의 피가 흐르고, 명림가의 가풍을 물려받은 명림원지도 최고의 전략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는 사물가야의 폭군 한기인 소아장을 죽이고 현재 소아주를 등극시킨 자이다. 다만 이후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지금 옥중에 갇혀 있지만 역사와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통찰력은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특이한 데가 있다.’

뇌옥 바깥에서는 장맛비가 계속 내렸다. 오늘도 비 때문에 바깥 작업장에 노역을 나가지 못한 죄수들은 어두컴컴한 동굴뇌옥에서 이나 빈대를 잡으며 잡담을 나누거나 고누, 밤윷, 팔씨름 따위를 하고 있었다. 입구 쪽 방에서는 제법 큰 싸움이 나 우당당탕 소리가 나고 욕설이 오갔다. 사람들이 좁은 데서 할 일 없이 앉아 있으면 짜증이 나고 별 이유 없이 싸움이 나기 마련이다. 개털과 범털 두 놈이 개의 자지 속에 박혀 있는 심이 뼈다’, ‘아니다 힘줄이다며 서로 우기다가 개 같은 놈이라는 욕설이 튀어나오고 종내는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하지왕과 우사, 모추는 연일 내리는 비로 사형집행이 미뤄줘 생명이 연장되고 있음을 가야의 천신 이비가지에게 감사드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하지왕은 다시 목창살을 사이에 두고 명림원지와 마주 앉았다.

하지왕이 명림원지에게 물었다.

와륵선생, 그러면 진정 천하일통의 대업을 이룬 자는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