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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가지 시 감상

마음읽기 /죽는게 뭐라고

작성일 : 2021.06.15 08:24

 

 

죽는게 뭐라고 /박홍배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모두가 죽는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물론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일 것이다. 굳이 따져본다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압박의 경중은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필자는 어느 문예지에서 친구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글을 쓴 적이 있다.

 

죽는 거 뭐 별 거 있겠냐, 한 번 오면 다 가는 세상인데. 걱정 말고 병원에서 하자는 데로 하자. 그동안 너희들 덕분에 잘 살았지 않았나. 아버지 어머니 곁으로 가야지.”

죽음을 통보받은 사람 같지 않았다. 암을 통보받은 사람에게 제일 먼저 찾아오는 현상은 나에게는 절 대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부정과 분노 현상이라는데 이 친구는 그렇지 않았다. 너무 태연하게 죽 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평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고를 하던 터라 그의 말이 그런대로 이해되 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의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사노 요코의 죽는게 뭐라고를 보면서 내내 나의 머릿속을 맴돈 것은 죽기 전 친구의 모습이었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죽는 게 겁나는 사람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을 이 책의 사노 요코를 통해서 또 보게 된 것이다. 돈과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그렇게 훈계하던 아버지 덕분인가, 사노 요코는 회생할 수 없는 암 선고를 받고 죽는 게 전혀 두렵지 않은 것도 파더 콤플렉스 탓일지 모른다고 농담을 건네는 정도다. 오히려 더 살지 않고 이런 나이에 죽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한다. 가식이라고? 아니 이 책을 다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절대 가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냥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게 된다.

 

암이 재발해서 뼈로 전이되었을 때, 의사는 죽을 때까지 치료비와 간병비로 1000만 엔 정도 다고 했다.

일흔 쯤 되면 더 이상 나에게 돈 들 일은 없겠지.

나는 항암제를 거부했다.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불쾌한 1년이라니. 연명하더라도 불쾌한 1년을 보내 야 한다면 그편이 더 고통스럽다. 아까운 짓이다. 가뜩이나 노인이 된다는 건 장애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일흔 전후는 딱 좋은 나이다. 아직 그럭저럭 일할 수 있고, 스스로의 뒤치다꺼리를 할 수 있다.

나는 착하게 살아왔음이 틀림없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분명히 존재하며 나를 제대로 지켜봐준 것이 다. (돈과 목숨을 아끼지 말아라)

 

내가 착하게 살아왔기에 적당한 나이에 죽는다고 다행스러워하는 사람, 그래서인지 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재규어를 산 사람, 이런 사람을 일러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 가장 죽기 좋은 시기 중 하나는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을 넉넉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게 다 쓰고 난 뒤에 그냥 사라지는 것도 행운이라는 것이다. 여러모로 그녀는 죽을 의욕에 충만해 있었다.

이 책의 한 부분은 쓰키치 신경과 클리닉 이사장인 히라이 다쓰오씨와 사노 요코 간의 대화가 삽입되어 있다. 거기서 다쓰오씨는 여러 가지를 제대로 생각하며 지내온 사람은 확실한 사생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사노 요코가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많아 멘털 케어가 훨씬 힘든데, 인생이란 이런 거랍니다, 생물이란 이런 거랍니다, 하는 설명에 의사들도 지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노 씨의 에세이 죽는게 뭐라고를 사람들에게 좀 더 알리고 싶다고 말한다. “‘죽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두 기운차게 사이좋게 죽읍시다.’라고, 평소 진료 중에도 환자한테 이렇게 죽을 의욕에 가득 찬 사람이 있다며 보여주기도 해요.”

그러나 사노 요코에게도 죽음에 대한 조그마한 두려움도 없겠는가. 아니 어떻게 보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을 뿐이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노 요코도 사람들과 지내는 따스함을 안다. 특히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다른 사람이 떠나고 난 다음의 외로움은 더 절실하게 다가오기도 했을 것이다. 요양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옆방 할머니가 떠나고 난 뒤 오는 외로움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내 옆방은 텅 빈 채였다.

밤이 되면 레이스 커튼 건너편이 어둠보다 더 짙은 덩어리로 변했다. 그 검은 덩어리 속에도 공기나 산소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작은 오랜지색 불빛이 비치고, 가만가만 인기척이 내 방까지 들려오던 때의 따스함이 그리워졌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다.

 


꽃이 지면 벚나무의 존재조차 까먹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비친 산의 단풍은 어딘가 이상했다. 꽃이 피고, 닭이 울고, 반했니 어쩌니 울부짖고, 돈이 있니 없니, 밥이 맛있니 맛없니 이 세상의 모든 천국과 지옥은 고타쓰 위에 있다.” 고 말하는 사노 요코는 그렇게 의욕적으로 받아들이는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는 한 가련한 인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노 요코의 글을 읽노라면 언어에 대한 그녀의 재치있는 감각을 새삼 느끼게 되고, 언어의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작가에게 뛰어난 문장력은 필수적으로 동반해야 하는 작업이지만 작가에 따라서 그 우열의 수준도 무시못할 작가에 대한 판단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노 요코는 언어의 마술사다. 평범하고 별것도 아닌 일상의 일들이 그녀를 통해 아름다운 글이 되고 문학이 되는 상황들을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거의 일평생을 지구와 평행하게 살아왔다. 드러누워서 책이나 텔레비전, 빌려온 비디오를 보았다. 지금도 침대 맞은편에 42인치 텔레비전을 두고서 당당하게 본다.’

지구와 평행이라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너무 쩨쩨하고 욕심많아 싫어하는 친구 이야기다.

‘“있잖아, 프라다 스웨트 나 줘.” 그녀가 어제 말했다. 내가 곧 죽을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까지 살지도 모르는데. 나는 웬일인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지나치게 정직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하늘에서 계시라도 받은 듯 미움에서 해방되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쩨쩨함과 욕심에 꽁해 있던 마음에서도 해방되었다.

, 뭐든 다 주마. 모조리 다 가지고 가렴. 물건이 다 뭔가. 그녀는 신이 내린 내게 준 리트머스 시험지다. 나는 마치 성불이라도 한 것 같았다.’

나도 이제 글렀어. 돈은 있는데 갖고 싶은 물건이 하나도 없지 뭐야. 나이 드니까 욕심이 없어져. 욕심은 젊음인가 봐.

나는 불현듯 싱글벙글 씨의 성욕은 있지만 정력은 없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싱글벙글 씨는 아직 청춘인가.’

등등의 글들이 그녀의 기발하고 특출한 언어 감각을 읽게 한다.

그런데 정작 사노 요코 본인은 우리 삶에서 언어의 긍정적 가치에 이의를 제기한다.

 

인간에게 언어란 매우 중요하다. 언어만이 인간을 증명한다고도 할 수 있다.

언어는 민족의 자랑이다. 세계의 어느 국가에서든 언어가 민족의 자랑이 되어야만 한다.

입버릇이 나쁜 인간은 고릴라보다도, 소보다도 못하다.

동물들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하고도 적막한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독한 눈을 잃어버렸다. 그런 눈은 온갖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탐욕스럽게 번들거린다.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렇게 변해버렸다. (<끊임없는 불꽃놀이> )

 

언어에 의해서 우리 인간은 본래의 순수함을 잃었다고 말한다.

활자를 믿지마라. 인간은 활자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더 신용하니까.”

환자의 언어 건너편에 있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누구도 부닥쳐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성이나 언어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노 요코의 글은 관념적인 것보다는 구체적 현실이 더 강하게 살아 있다. 그런 면에서 관념의 대명사인 언어에 다소 부정적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