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작성일 : 2021.06.07 10:36 수정일 : 2021.06.07 10:41
대가야제국의 부활(21)
제4부 하지왕과 명림원지(2)
/김하기
하지왕은 배가 고픈 마련으로 해서 수수밥 덩어리를 한입 베어 물었다. 역한 쉰 냄새가 코에서 물씬 풍기고 입에서 수수껍질이 까끌거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꿀꺽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왕의 위엄을 잃지 않고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저절로 한숨이 포옥 나왔다. 하지왕은 돌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동안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하지왕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이 유복자로 태어났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부왕 회령대왕은 광개토대왕에 의해 참수 당했고, 왕비 여옥의 뱃속에 있었던 태아 꺽감은 태어나자마자 죽여라는 태왕의 지엄한 명을 받았다. 여옥은 뱃속의 아기를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무위로 끝나고 아기는 출산과 동시에 고구려 도독 고상지의 칼에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충신 후누 장군과 수경 부부가 갓 태어난 자신의 아들과 바꿔치기해 한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친 뒤에야 꺽감은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꺽감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양부모인 후누 장군과 수경부인의 품에서 자랐다. 하지만 꺽감이 회령왕의 아들이라는 것이 노출되자 신라로 피신해 수경의 외가인 우시산국의 달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쇠를 만드는 달천 철장 쇠부리에서 아름다운 우시산국의 소녀 소라와 함께 철없이 놀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대가야를 지배하고 있던 고상지와 박지가 주색잡기로 국정이 느슨해진 틈을 타 꺽감은 잠시 귀국했으나 다시 고구려의 질자로 뽑혀 양모 수경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광개토대왕과 장화왕후 아래서 격동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수양어머니이자 보모인 수경에 의해 친모 여옥왕비가 꺽감을 낳은 뒤 국내성으로 끌려가 광개토대왕의 소후가 된 사실을 알았고, 꺽감과 여옥은 처음으로 감격적인 모자상봉을 할 수 있었다.
꺽감은 고구려 태학에 입학해 신라, 백제, 왜, 숙신, 후연 등 각 나라에서 끌려온 질자들과 함께 경쟁하며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무엇보다도 광개토대왕의 특별한 배려로 태왕으로부터 태자 거련과 함께 제왕학을 배운 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사서오경과 고구려사, 병법과 무술은 태학의 박사와 교수들로부터 배웠다. 하지만 실제 관료를 움직여 국가를 경영하고 신출귀몰한 병법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광개토대왕으로부터 거련과 함께 제왕학을 배은 것은 꺽감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 와중에 거련태자와 그의 누이동생 상희, 백제공주 다희와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면서 인연을 쌓은 것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지금은 신라왕이 된, 질자의 맏형 실성군과의 만남은 꺽감이 고구려인이 아니라 가야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꺽감은 질자생활을 하면서 머리가 굵어지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며 부쩍 성장했다.
그러나 박지 집사의 밀고로 질자생활은 위기에 빠졌다. 박지는 꺽감이 소후 여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장화황후에게 알렸고, 여옥을 질투하던 장화왕후는 이 사실을 광개토대왕에게 알려 왕명을 거역한 꺽감과 여옥, 수경을 죽이려고 했다.
그 때 한반도에 큰 전쟁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백제 아신왕의 꼬드김에 넘어가 금관가야의 이시품왕이 가야연맹군과 왜의 용병을 이끌고 신라의 서라벌로 쳐들어간 것이다.
금관가야의 신라 침공에 다급해진 내물왕은 즉시 상국인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광개토대왕은 직접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남정에 나서 서라벌을 점령하고 있던 이시품왕을 물리치고 감옥에 갇혀 있던 내물왕을 구출했다.
태왕은 그에 그치지 않고 임나왜소가 설치된 종발성까지 밀고 내려가 임나왜소를 멸하고 성에 농성하고 있던 금관가야왕 이시품왕과 백제장군 목라근자를 포로로 잡았다. 태왕은 금관가야를 아라가야의 왕에게 위임통치하고 포로로 잡은 이시품왕과 목라근자를 평양으로 끌고 갔다.
여가전쟁의 결과,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연맹체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침공으로 사실상 와해되었다. 가야연맹체 22개국 중 낙동 동북쪽의 6가야는 신라 내물왕에게 빼앗기고, 소백산맥 서쪽의 6가야와 대가야는 백제 아신왕에게 빼앗겼으며, 대왜 무역창구였던 종발성의 임나왜소는 없어져 대마도로 옮겨져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남은 9가야마저 고구려와 신라, 백제와 왜의 침공과 간섭 하에 실낱같은 가야의 국맥조차 끊어질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여가전쟁에서 대승했으나 고구려군의 남정을 틈타 국내성으로 침입한 후연의 모용성을 치기 위해 태왕은 급히 평양으로 귀환했다. 평양에서 광개토대왕은 꺽감과 소후, 수경을 죽이라는 장화왕후의 강청을 물리치고 오히려 소후 여옥의 원청을 들어 그들을 고향인 대가야로 돌려보냈다.
꺽감이 고향으로 돌아오니 대가야는 백제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 백제장군 목만치가 고상지 도독과 후누 장군을 물리치고 대가야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만치는 친고구려계인 박지 집사 대신 친백제계 염사치를 집사로 등용해 국방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했다.
꺽감이 돌아오자 대가야 부흥군은 활기를 띠었다. 그동안 후누 장군은 가야산에서 대가야 부흥군을 조직하고 군사력으로 대가야 회복을 노렸으나 여의치 않았다. 대가야에서 도망친 박지 집사는 화려한 외교술로 광개토대왕으로부터 포로 목라근자를 넘겨받아 그의 아들 목만치와 협상했다. 주전파인 후누 장군이 대가야로 쳐들어가 군사력으로 압박하는 가운데 협상파인 박지 집사는 목만치와 협상을 벌여 목라근자를 넘겨주는 대가로 어라성을 돌려받는 것으로 아퀴지어 마침내 대가야를 되찾을 수 있었다.
박지 집사의 외교술과 후누 장군의 군사력에 의해 대가야로 귀환한 꺽감은 열두 살에 대가야의 왕위를 되찾았다. 하지만 나라는 어머니 여옥왕비의 섭정 아래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박지와 후누는 섭정 여옥왕비를 둘러싸고 서로 건국의 공을 다투었다. 처음에는 박지가 환관 근대를 왕비에 침전에 보내고 후누 일파를 숙청하면서 앞서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후누의 부인, 수경이 왕비를 움직여 박지의 부패와 국정농단을 사정하자 위기에 몰린 박지는 고구려 장화왕후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대가야의 내홍은 극에 달했다. 결국 박지 집사는 하지왕이 태사령 우사와 함께 금관가야로 간 틈을 타, 신라장군 석달곤을 불러들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섭정 여옥은 별궁에 유폐되고 후누 장군은 뇌옥에 갇혔으며 하지왕은 역적과 현상금의 딱지가 붙어 정처 없는 도피 길에 올랐다.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하지왕은 태사령 우사와 호위무사 모추와 함께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산적 구투야의 산채에서 구투야, 소마준과 같은 산적들과 어울려 지내기도 했고, 건질지의 비화성에서는 중신들의 모략과 건질지의 배신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왕은 나라를 되찾을 책사를 구하기 위해 지리산 칠불사로 가 석공스님을 만나 대업을 논했다. 그러나 석공은 하지왕의 책사를 거절하며 자신보다 백 배 뛰어나다는 와룡산 와륵선생을 소개해 다시 와룡산의 와륵선생을 찾아가다 사물성에서 변을 당했다.
사물성 비토섬에 왜인이 쳐들어왔다는 정보를 한기 소아주에게 전해주려다 도리어 현상금에 눈먼 소아주에게 잡혀 절체절명의 죽을 위기에 빠진 것이다. 오늘 아침 사형집행이 결정되었으나 명림원지가 예측한 폭우로 인해 하루 연기되어 하지왕의 목숨은 백척간두에 걸려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만나기를 고대했던 명림원지 와륵선생을 뜻밖에도 이곳 뇌옥에서 만난 것이다. 처음에는 그의 옥중 형편과 초라한 외모, 허황된 변설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을수록 지혜와 지식, 경륜이 녹록치 않으며 석공스님의 인물평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둑을 둘 때 한두 수 앞을 보고 돌을 놓는 것이 아니라 바둑판 전체를 보고 세력과 실리의 판세를 읽으면서 착점을 하는 형국이다.
우사와 모추는 조급하게 파옥이라도 할 것을 재촉하지만, 하지왕은 명림원지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소신껏 말할 때는 적어도 이곳을 빠져나갈 한 점 묘수는 마련해놓았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하지왕은 가마니를 덮고 자며 쉰 수수밥 덩이도 꾸역꾸역 먹어치웠던 것이다. 이를 보던 우사와 모추가 황송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이 잘 보필하지 못해 대가야의 왕이 역적으로 쫓겨 다니다 뇌옥에 갇혀 짐승보다 못한 꼴을 겪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추는 하지왕이 여름더위에 쉰 수수밥덩이를 삼키는 모습을 보고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하지왕이 와룡산 자락 바위를 판 뇌옥의 북벽에 기대어 속절없이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는데 옥졸이 소리쳤다.
“배출!”
똥통을 배출하고 잡수통에 물을 담아오는 시간이었다. 죄수들이 차례대로 잠시 밖으로 나가 똥간에 똥통을 부시고 계곡물을 끌어들여 저수한 석조에서 잡수통으로 물을 길어왔다. 차례가 되어 옥방 문이 열리자 모추는 냄새나는 똥통을 들고 우사는 빈 잡수통을 들고 나갔다. 하지왕은 그 뒤를 따라 비척비척 걸어 옥문 밖을 나갔다.
고맙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어둡고 낮은 구름에서 떨어지는 비낱은 산바람을 타고 사선을 그으며 바닥을 때리고 있었다. 눅눅하고 퀴퀴한 옥중 공기에 비해 포말이 튀는 바깥공기는 청량하고 시원했다. 코를 벌름거리며 폐를 청신한 공기로 채웠다. 비에 옷자락이 흠뻑 젖었다.
하지왕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내리는 비에 온몸을 맡기며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묵도했다.
‘천신 이비가지와 산신 정견모주, 선조대왕들이시여. 생명의 비를 내려주시니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당신들의 은택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에서 생명을 건졌나이다.
하지만 지금 당신들이 퉁겨낸 노질왕가의 단 한 점 혈육인 저, 하지는 도마에 오른 생선과 작두 밑의 풀처럼 칼날에 베여질 시각만 기다리고 있나이다. 진정 못난 후사에게 한 가닥 대업의 사명이 남았다면 이 한 점 혈육을 불쌍히 여기소서.
비를 내리소서. 비를 내리시되 한 달, 두 달, 석 달 열흘간 계속 내리소서. 그리하여 비로써 이 부패하고 타락한 소아주의 사물성을 모조리 쓸어내리소서.’
하지왕이 두 팔을 들고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간절한 염원을 올렸다.
하지왕이 비를 맞고 옷을 흠뻑 젖은 채 서있는 모습을 모추와 우사가 보았다. 모추는 부신 똥통을 들었고 우사는 물을 채운 잡수통을 들고 있었다.
우사가 말했다.
“마마, 아무리 여름비라도 많이 맞으면 좋지 않습니다. 들어가십시다.”
하지왕이 말했다.
“이 비가 한 열흘 왔으면 좋겠구나.”
우사가 잡수통을 껴안은 채 맞장구를 쳤다.
“열흘 아니라 석 달 열흘간 내리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하지왕은 비에 흠뻑 젖은 채 동굴 뇌옥 안으로 들어가며 다짐했다.
‘내일 아침 해가 나서 목이 잘릴망정 사는 데까지 살아보자.’
옥방의 죄수들은 핫옷에 붙은 이와 벼룩과 빈대를 잡으며 두런두런 잡담을 나눴다. 주로 이들이 나누는 잡담 주제는 먹는 것, 여자 이야기, 왕년에 잘 나갔던 일 따위로 얘기를 부풀리거나 각색해서 떠들어대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배식당번을 맡았던 텁석부리 모개와 살짝 곰보인 고두쇠가 옷을 벗고 이를 잡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목소리가 큰 모개가 토스레 핫옷 솔기 사이에서 잡은 이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허 요놈 이가 보리알만 하네. 이 놈은 내 피를 빨아묵고 나는 이 놈을 잡아묵고. 이렇게 살면 핑생 밥을 안 무도 살 수 있는 거 아이가.”
“예끼, 차라리 빈대 등에 육간대청을 지어라. 우째 이만 묵고 핑생을 살겠노.”
살짝곰보 고두쇠는 잡은 이를 어금니로 톡톡 터트리며 핀잔을 주었다.
“수수밥뎅이가 갈수록 쪼맨해지니 내사 이라도 잡아무 몸보신하겠다 이거야.”
“하긴 글타. 시어터진 수수밥뎅이라도 배터지게 무밨으면 좋겠다. 씨발놈들이 차라리 벼록이 간을 빼묵지 세상에서 젤 배고픈 우리 도둑놈들 밥뎅이를 깎아 처묵냐.”
텁석부리 모개가 밖으로 턱짓을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헌데 저, 건넛방 하지임금이라는 젊은애 말이야. 참 희안치도 않제?”
“와?”
“임금이라는 자가 덕식에 가마이를 덮어도 잠도 쿨쿨 잘 자고 시어터진 수수밥뎅이도 게눈 감추듯 묵어치우던데, 진짜 대왕구 맞나?”
“방장님이 우리한테 그캤으면 맞겠지.”
텁석부리 모개가 잡은 이를 털어 넣고 우물거리며 고두쇠에게 말했다.
“고두쇠, 니는 방장님의 밀서를 골편수한테 줐나?”
“하모. 모개 니는?”
“나도 석장한테 좄지. 시발놈들, 조금만 기다리라. 곧 나라가 디비질기다.”
명림원지는 모개와 고두쇠를 통해 노역장 철장의 골편수와 채석장의 석장에게 밀서를 보냈다. 골편수는 명림원지의 옛 지기였고, 석장은 고두쇠가 뇌물로 구워삶은 자였다.
고두쇠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나지막히 말했다.
“쉬이, 니 목소리는 천둥처럼 큰 기 탈이야. 옥졸이 듣는다. 만사 불여 튼튼이라고 이런 비밀시런 이바구는 주디 야물게 딱 잠구는 기 최곤기라.”
“글타. 그라모 마, 고두쇠 니가 왕년에 잘 갔을 때 고 이바구 해바라.”
“무슨 이바구?”
“거, 바둑 가지고 사기치던 이바구 말이다. 고 이바구는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기라.”
“비도 살살 내리는 데 또 한 바퀴 돌려보까.”
고두쇠가 한 때 잘나갔던 시절을 떠올리며 얘기를 하려고 하자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던 막쇠, 코벌름이, 삭불이도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모개, 니도 알다시피 내 바둑 실력이야 천하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지. 장돌뱅이로 돌아다니다보면 지방마다 한두 명 씩은 꼭 내기바둑에 미친 놈들이 있네. 한 번은 가야 두루미 지방에 내기바둑으로 재물을 산더미처럼 모은 장재라는 놈이 있는 거야. 헌데 이 장재라는 놈은 이제 재물만 걸고 바둑을 두면 흥미가 없으니 반드시 집문서에 마누라와 하룻밤을 걸어야 바둑을 둔다는 거야.”
“저런 천하에 똥물에 튀겨 죽일 놈. 도박에 눈멀면 집문서와 마누라까지 잽힌다더니 장재놈이 그 꼴일세.”
텁석부리 모개는 수없이 그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처음 듣는 양 화를 내며 맞장구를 치며 얘기 흥을 돋웠다.
“그래서 내가 가짜 집문서를 만들고 고운 기생을 내 마누라랍시고 다리고 장재집에 들어갔지. 장재 놈이 기생을 슬쩍 훑어보더니 안방으로 헛기침을 하는데 여자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걸어오는기라. 얼굴을 설핏 보니 이놈 장재의 마누라는 꽃도 부끄러워할 천하절색이라 눈앞이 아뜩한데 치마를 슬쩍 걷어 올려 말신말신한 종아리를 비주는데 보는 것만으로 골즙이 쏵 빠지는 기분인기라. 장재가 바둑판을 내면서 하는 말이 ‘규칙은 알고 왔겠지요?’라고 하는 기라. ‘물론입죠.’라고 답하고 바둑을 두기 시작하는데 옆에서 헤끔거리며 보는 장재 마누라 때문에 자꾸만 수가 헛갈리는 거라.”
“장재 마누라가 우쨌길래.”
“이 요물이 차도 내왔다, 꿀에 절인 깐 밤알도 드시라고 하지 않나. 자꾸만 수가 헛갈리는 거라. 계가를 하는데 좋던 내 세력이 삭감되고 아무리 세바도 집 수가 부족한 기라. 그래서 한 판을 지고 말았네. 흠흠, 이야기하다보니 목이 마르네.”
막쇠가 재빨리 종발이에 물을 따라 고두쇠에게 대령했다.
찬물을 한 사발 마신 고두쇠가 큼큼 목을 다듬더니 얘기를 이어갔다.
“고, 요물에 홀려 장재 놈한테 바둑을 지고 말았네.”
텁석부리가 고두쇠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런, 제이기. 바둑판만 들바다보마 되지, 왜 남의 마누라를 치마 밑을 들바다보다 그 꼴이 난 건가.”
“아, 사람아. 가야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단 말이야. 바둑은 삼세 판이야. 먼저 한판을 내준 거지. 두 판 째에는 내가 마누라랍시고 데리고 간 기생 맹월이에게 신호를 보냈지. 맹월이가 ‘오늘 날씨가 왜 이래 덥지?’하며 저고리 섶을 벌리고 가슴을 반쯤 드러내 놓은 채, 부채로 활활 부치기 시작한 거야. 맹월이 가슴은 몽실몽실한데다 꽃봉오리처럼 봉긋하고 숨이 막히게 예쁘게 생긴 거야. 장재 놈이 바둑을 두다 거기를 흘낏 보고는 침을 꿀꺽 삼키데.”
이 말에 텁석부리, 막쇠, 코벌름이, 삭불이도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 그래, 이 판만 이기면 맹월이 가슴이고 엉뎅이고 다 지 꺼라고 생각하는 기지. 바둑에 이런 마가 꾀면 그때부터 허수가 보이는 기라. 실력이 비등비등할 때는 그게 천지차이인 거라. 둘째 판은 내가 이겼지.”
“그라모 일대일 아이가. 마지막 셋째 판은 우찌 됐노?”
텁석부리가 궁금증을 유발하며 분위기를 돋웠다.
“그래, 마지막 셋째 판이 시작되는데 바짝 긴장되는 기라. 이 한 판에 집문서와 마누라가 다 달려 있는 거야.”
“우리도 긴장되네, 그려.”
“그려, 그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걸고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일 때도 이 만큼 긴장은 되지 않았을 거야.”
텁석부리 막쇠 코벌름이 삭불이도 덩달아 과장을 떨며 장단을 맞추었다.
고두쇠는 물을 한 번 마시고 헛기침을 하며 흠흠 목을 다듬고는 얘기를 시작했다.
“바둑은 자고로 상대의 마음을 뺏아묵는 놀이야. 치열하게 싸우다보니 두 대마가 서로 태극 모양으로 뒤얽히고, 마지막에 천지대패가 걸려 패를 이기는 놈이 만방으로 이기게 대 있는 기라. 장재놈이 팻감을 찾아 눈알을 디룩디룩 굴리는데 아뿔사 내가 팻감이 딱 한 개 적은 기라. 클났다 싶었지. 역시 장재놈이 바둑에 실력과 자신이 있으니까 천하절색 마누라까지 내기바둑에 미끼로 던져 남의 가산과 마누래를 뱀처럼 삼킨 거구나 생각했지.”
“그래, 천지대패는 누가 이겨 남의 마누라와 하룻밤을 잔 기고?”
텁석부리가 재촉했다.
“그러세,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고 내 얘기를 마저 들어보게. 내 패가 다 떨어지자 맹월이에게 신호를 보냈지. 맹월이가 다시 부채를 집더니 ‘아, 더워. 밑이 눅눅하게 땀이 찼네.’하며 치마를 고쟁이와 항꾼에 걷어올리고 슬슬 부채질을 시작한 거야. 맹월이의 기럭지가 긴 허벅지와 옴팡한 그곳이 햇볕에 훤히 다 비최는 기라.”
고두쇠가 딱 얘기를 끊고는 배가 출출하고 허기가 져 말할 힘이 없다고 운을 떼자 이번에는 코벌름이가 감춰둔 마른 수수밥덩이 반쪽를 꺼내 대령하며 말했다.
“그래, 기생의 가운데를 본 장재 놈이 우째 됐노?”
“허허, 수수밥뎅이 반쪽으로 간에 기별이나 가겠나.”
“난 그것만 먹어도 힘이 솟아 트림하고 방구 끼고 용두질까지 한번 하네.”
“아이가, 맹물 묵고 이빨 쑤신다더니 코벌름이 니가 그 꼬다릴세.”
“어쨌거나 이바구는 계속 해야 맛이지. 그래, 천하의 호색한인 장재놈이 그 숨맥히는 절경을 놓칠 리 있나? 맹월이가 ‘이 집은 왜 이래 덥냐’며 가랑이를 벌리고 가운데를 옴죽옴죽하며 부채질을 슬슬 하니 장재 놈이 눈알이 핑글핑글 돌아 하수도 보이는 뻔한 팻감을 보고도 청맹과니가 되어 찾지 못하고 쩔쩔 매는 기라.”
“장재놈, 쪼매마 참으모 될낀데 그런 반핀이가 있나?”
텁석부리도 장단을 맞췄다.
“헌데 궁지에 몰린 장재 놈이 지 마노라한테 신호를 보내는기라. 내 지금 바둑이 망하게 생겼는데 니는 머하노. 저 짝에서는 저렇게 노력을 하는데, 니도 저 놈을 쫌 홀기바라고 계속 눈을 굼쩍굼쩍하는기라. 헌데 첫판에는 치마를 슬쩍 걷어 말신말신한 종아리를 내놓던 장재 마노라가 팽 콧방귀를 뀌고는 부뚜막에 올라간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바둑판만 내리다보고 있는기라. 겔국 나는 팻감이 모자란 놈의 대마를 잡고 바둑을 이겼지. 그리하야 장재놈의 집문서와 마누라를 항꾼에 앗아 그 집에서 나왔다는 이바구지.”
삭불이가 말했다.
“그 이바구 진짜가?”
“아따, 삭불이 니는 속고만 살아왔나. 후일담이 있네. 내가 장재 마노랄 데꼬 오면서 ‘왜 장재가 신호를 보내는데도 팽 코를 풀고 가만히 있었냐’고 물었지. 그 덕에 내가 이길 수 있었다고 말이야. 그러자 하는 말이 처음 내가 집에 바둑 두러 들어올 때 눈이 아찔했다는 거야.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며 시원시원한 걸음걸이로 헌헌장부가 들어오더라는 거야. 더욱이 이 잘 생긴 얼굴에 요로케 살짝 얽은 곰보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고두쇠가 자기 자랑을 하자 죄수들이 씨불씨불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헌데 꽃 같은 장재 마누라가 날 사뿐사뿐 따라오면서 하는 말이 ‘서방님, 제 꿈속에서 그리던 서방님을 만나 하룻밤 운우지정을 나누고 싶어 일부러 그랬사옵니다.’ 하는 거야.”
고두쇠가 여자 말까지 흉내 내어 ‘서방님~’하고 코맹맹이 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자 감방에서 죄수들이 군욕을 하고 난리가 났다.
“서방님, 운우지정 같은 소리하네. 지랄 옘병을 떨어라.”
“서방님~, 귀가 간지러버 죽겠다. 누가 저 창살목을 뽑아줘. 내 귀 쫌 후비게.”
“곰보인 주제에, 아나, 니 외할매 콩떡이다.”
“차라리 내 두 귀를 조방망이로 틀어막고 더 이상 니 이바구 안 들을란다.”
“니 고 말에 그럴듯한 이바구가 다 가짓부렁이 되뿌는기라.”
“장재 마누라와 자기는 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