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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5.31 09:43
대가야제국의 부활(20)
제4부 하지왕과 명림원지(1)
김하기
명림원지가 쥐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천시가 임박했습니다. 머지않아 곪을 대로 곪은 사물국에 종기가 터져 정변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사가 명림원지의 말에 퉁을 놓았다.
“선생, 당장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우리에게 천시를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소?”
명림원지가 말했다.
“천시는 조율하면 되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했듯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합니다. 천시와 지리를 움직이고 활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지요. 저는 지난 오년 간 옥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내보냈는데 이들 중 몇몇은 사물국과 가야제국의 정사당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삼십 여명의 죄수도 제 수하에 있습니다.”
하지왕, 우사, 모추가 기율, 정찰, 문방의 옥중 품계를 받았듯이 현재 옥중에 갇혀 있는 죄수 30여명도 모두 품계를 받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 뇌옥에는 잡범과 오사리잡놈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들도 제 재주에 맞는 역할을 맡으면 일당백을 감당할 능력자들입니다. 또한 죄수들 중에 우사 선생처럼 뜻이 있는 지사들도 없지 않습니다.”
명림원지가 옆에 앉아 있는 좌평 수수보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봉두난발의 좌평 수수보리도 한때 백제의 내신좌평 산하, 곡내부 소속의 5품 내솔이었습니다. 여가전쟁에서 백제로 넘어간 가야 6국(상기문(임실, 번암), 하기문(남원), 상다리(순천, 광양), 하다리(여수, 돌산), 사타(고흥), 모루(무안)) 중 상다리에서 관직 외위 4품인 주수를 맡은 수수보리는 사물국과 주류와 곡물, 해산물 등을 거래했습니다. 하지만 소아주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고 거래를 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사물국의 물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여기에 갇혀 있습니다.”
“흠, 횡령죄로 갇힌 수수보리는 백제인이군요.”
“그렇습니다. 해상 무역에 매우 밝은 자지요.”
우사가 말했다.
“그럼, 내일 무슨 수가 나는 겁니까?”
“일단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취침하도록 합시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불어오겠지요.”
목창살 사이로 명림원지와 하지왕, 우사, 모추는 취침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왕은 흙바닥에 덕석을 깔고 누더기와 함께 기운 가마니를 덮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이면 소아주는 망나니를 보내 세 사람의 수급을 베어갈 것이다. 백척간두에 누운 셋은 모두 전전반측이었다. 우사와 모추는 그렇게나 만나기를 고대했던 명림원지가 죄수로 있는 것이 못미더워 실망감을 금치 못했지만 하지왕은 왠지 모르게 신뢰감이 생겼다.
‘그래,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하지왕은 하루 종일 피곤한 마련으로 죽음보다 깊은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옥졸이 기상 패종을 두드렸다. 하지왕과 우사, 모추는 가마니를 걷고 일어났다. 아침 햇살이라곤 한 오라기도 들어오지 않아 옥졸의 패종이 아니면 아침인 줄도 알지 못했다.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을 잔 하지왕과는 달리 우사와 모추는 밤새 잠을 설쳤는지 눈이 퉁퉁 부은 모습이었다. 옥졸이 ‘점호’를 외치자 방마다 번호를 대며 머리 숫자를 확인했다.
점호가 끝난 뒤 명림원지가 하지왕에게 인사를 했다.
“대왕마마,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잘 잤습니다.”
“역시 마마의 간담은 크십니다. 두 분과는 달리 코를 고시며 주무시더이다.”
“인명은 재천인데 걱정한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습니까. 그보다 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게지요.”
“오늘 아침에 사형 집행이 있을 것 같습니다.”
“......”
“평소 같으면 점호가 끝남과 동시에 옥졸이 방을 따고 죄수의 발에 차꼬를 채워 노역장으로 끌고 나가느라 부산한데 오늘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지 않습니까?”
노역수는 기상과 동시에 발에 차꼬를 차고 바깥으로 나가 채석장, 철장, 건축 등 중노동에 동원되어 하루 종일 돌 다듬기, 돌 옮기기, 주물하기, 터파기 등 중노동을 한 뒤 다시 뇌옥으로 돌아오는 게 일과였다. 노역수들은 힘들지만 바깥에 나가 그나마 햇볕이라도 한 자락 쬐니까 독거수에 비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대역죄인으로 분류된 명림원지는 잡범과는 달리 햇볕이 드는 바깥으로 노역을 나갈 수 없었다. 통풍이 안 되는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뇌옥에 꼼짝 않고 오 년을 앉아 있는 것은 차마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노역수라도 삼 년을 넘기기가 힘든데 명림원지가 독거수로 오 년 동안 버티고 있는 것은 기적과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옥졸이 죄수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대역죄인의 사형집행이 있으므로 노역이 없다. 모두 앉아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도록!”
죄수들이 웅성거리며 모두 하지왕과 우사, 모추를 쳐다보았다.
조금 뒤 옥문이 덜컹 열리더니 망나니를 대동한 형리들이 들어왔다.
“사물국 한기님의 명에 의해 대역죄인 하지, 우사, 모추는 수급이 베어져 고향 대가야로 돌아갈 것이다. 머리로나마 고향으로 돌려보내는지는 것은 한기님의 은전이다. 대역죄인들은 나오라.”
하지왕과 우사, 모추는 손발에 차꼬가 채워진 채로 옥방을 나왔다.
하지왕이 명림원지에게 마지막 하직인사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고 싶었던 와륵선생을 여기서나마 뵈어서 다행이었소.”
명림원지가 큰절을 하며 말했다.
“저도 마마를 뵌 게 큰 광영이었습니다. 저승길은 굽이굽이 멀고 황천은 큰 강이라는데 쉽게 건너겠습니까. 천시를 보건대 저승 가기 전 이승의 어느 모롱이에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망나니와 도수들은 순식간에 하지왕과 우사, 모추를 에워싸 사형장으로 끌고 갔다.
사물국 한기 소아주가 배를 내밀며 사형 집행장에 도착하자 망나니가 말했다.
“대역죄인들은 대 한기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오!”
도수들이 셋의 무릎을 꿇리자 소아주는 망나니에게 집행명령을 내렸다.
“대역죄인 하지와 우사, 모추는 참수해 그 수급을 대가야 어라성으로 보내라!”
“알겠사옵니다.”
망나니는 회자수 칼을 받들고 읍을 했다. 창대수염이 난 망나니는 키가 구척장신으로 사형수의 목을 열 경 이상 베어본 노련한 자였다.
우사가 소아주에게 큰 목소리로 항변하였다.
“한기, 도대체 우리 죄가 무엇이란 말이오? 멀쩡한 나라를 찬탈하고 주군을 내쫓은 악당인 박지와 석달곤이 대역죄인이지 아무 죄 없이 내쫓긴 우리가 왜 대역죄인인 것이오?”
소아주가 우사에게 말했다.
“아무 죄 없이 바보처럼 내쫓긴 그것이 바로 대역죄다. 먹물깨나 먹었다는 놈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이 대역죄인이 된다는 걸 정녕 몰랐단 말이냐? 네 놈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국정을 농단하고 재물을 착복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기에 망했을 테지. 권력을 잃은 뒤에는 도적들과 한 몸이 되어 온갖 살인과 강도 행위를 저질렀으니 참으로 참수형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대역죄인들은 목을 내밀라.”
하지왕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옆의 우사와 모추를 보며 탄식했다.
“우사, 모추, 참으로 미안하오. 그대들은 지금까지 줄곧 나와 더불어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건만 결국 빛도 한번 보지 못하고 이대로 가는구려. 이생에서는 못난 암주를 만났으나 다음 생에서는 현명한 주군을 만나 부디 복락을 누리고 사시오.”
망나니가 칼을 높이 흔들면서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형수의 목을 베기 전 허공에 칼을 휘두르며 한바탕 춤을 추는 것은 사형수의 혼을 빼어 공포를 덜어주고 죽음의 고통을 유희로 달래기 위함이다. 또한 망나니의 칼춤은 무당이 방울을 흔들어 귀신을 쫓듯 삿된 것을 물리치고 죽음을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는 엄숙한 장례의식이기도 한 것이다.
망나니가 칼춤을 다 춘 뒤 사정없이 모추의 내민 목을 뎅겅 날렸다. 모추의 수급이 흙바닥에 떨어져 피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하지왕은 아직도 살이 파르르 떨리는 모추의 몸을 붙들고 울부짖었다.
“모추야, 왕자처럼 늠름하던 천하제일의 무사가 이런 개죽음을 당하다니!”
이어 망나니는 우사의 목을 쳤다. 우사의 수급도 땅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아, 태사령. 지혜로운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도척 같은 소아주의 칼에 허망하게 죽다니. 하늘의 도는 진정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망나니는 하지왕에게 다가왔다. 칼이 허공에 번뜩였다. 하지왕의 머리는 창천에 붉은 피를 뿌리며 치솟았다 땅에 풀썩 떨어졌다.
아, 앗. 하지왕은 죽음보다 깊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악몽에서 깨어난 하지왕의 몸에는 진땀이 흐르고, 꿈속에서 칼이 지나간 뒷목을 만져보니 찬 소름이 돋았다. 목이 붙어 있긴 했지만 칼자국이 지나간 듯 싸아 한 게 서늘했다. 꿈에서 함께 수급이 베어졌던 우사와 모추는 다행히 양옆에서 발바닥을 드러낸 채 가마니를 덮고 자고 있었다.
깡깡깡.
옥졸이 기상 패종을 두드렸다. 하지왕과 우사, 모추는 가마니를 걷고 일어났다. 아침 햇살이라곤 한 오라기도 들어오지 않아 옥졸의 패종이 아니면 아침인 줄도 알지 못했다.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을 잔 하지왕과는 달리 우사와 모추는 밤새 잠을 설쳤는지 눈이 퉁퉁 부은 모습이었다. 옥졸이 ‘점호’를 외치자 방마다 번호를 대며 머리 숫자를 확인했다. 하지왕이 꾼 꿈과 너무 흡사했다.
점호가 끝난 뒤 명림원지가 하지왕에게 인사를 했다.
“대왕마마,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덕분에 잘 잤습니다.”
“역시 마마의 간담은 크십니다. 두 분과는 달리 코를 고시며 주무시더이다.”
간밤 꿈이 다시 되풀이되는 듯했다.
하지왕은 마치 백일몽을 꾸듯 명림원지에게 꿈속과 똑같이 말했다.
“인명은 재천인데 걱정한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습니까. 그보다 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게지요.”
“오늘 아침 사형 집행이 있을 것 같습니다.”
“......”
“평소 같으면 점호가 끝남과 동시에 옥졸이 방을 따고 죄수의 발에 차꼬를 채워 노역장으로 끌고 나가느라 부산한데 오늘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지 않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옥졸이 죄수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대역죄인의 사형집행이 있으므로 노역이 없다. 모두 앉아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도록!”
죄수들이 웅성거리며 모두 하지왕과 우사, 모추를 쳐다보았다.
명림원지가 하지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제가 이곳에서 만든 달력대로라면 오늘 비소식이 있습니다. 옥졸의 어깨 위에 비낱이 묻어 있는 걸 봤습니다. 이번 여름엔 아직 태풍도 장마가 오지 않았는데 오늘부터 바람이 불며 폭우가 시작될 것입니다. 비가 오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습니다.”
“그건 왜입니까?”
“대대로 내려오는 옥중 관습입니다.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하늘의 은전이라 믿는 게지요. 실제론 비 때문에 한기와 형리들의 행차가 불편한데다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아 공개처형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잠시 뒤 옥문이 덜컹 열리더니 빗물에 푹 젖은 도롱이를 입은 형리가 들어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형리가 하지왕과 우사, 모추를 보며 근엄하게 말했다.
“대역죄인들은 들어라.”
형리가 물걸레처럼 젖은 도롱이를 벗고 말했다.
“사물국 한기님의 명에 의해 오늘 대역죄인 너희 세 사람의 수급을 베기로 했다. 하지만 운 좋게도 폭우가 쏟아져 집행을 연기한다. 다만 이 비가 그치고 날이 개면 지체 없이 사형을 집행할 것이다. 너희들의 운은 그때까지다.”
형리는 옥졸에게 ‘감시를 잘 하라’고 엄명한 뒤 도롱이를 입고 뇌옥 밖으로 나갔다.
하지왕은 뒷목을 쓰다듬으며 명림원지에게 말했다.
“아직 이렇게 목이 붙어 있는 건 명림원지의 덕이오.”
“큰 뜻이 있는 자는 그 뜻을 이룰 때까지 하늘이 결코 죽이지 않는 법입니다.”
우사와 모추도 일단 참수의 위기를 넘겼지만 여전히 명림원지가 와륵선생인지 대해서는 긴가민가 의심했다.
우사가 여전히 볼멘소리로 명림원지에게 말했다.
“날씨 덕분에 형 집행이 잠시 미루어졌을 뿐 지금 우리의 목숨은 가마 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같소이다. 석공스님에게 듣기로 와룡산 와륵선생은 앉아서 천 리를 보며, 기재가 주무왕의 강태공, 한 유방의 장량, 고국천왕의 을파소, 촉한의 제갈량에 견줄 만하다고 했는데 와륵선생을 자처하는 방장님은 도대체 여기를 빠져나갈 묘책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오?”
명림원지가 우사에게 말했다.
“이번 장마는 쉽게 그치지 않을 것이오. 그동안 함께 계책을 마련해봅시다. 역사의 교훈과 나라의 흥망성쇠의 원리를 알고 있는 태사령 우사선생의 지혜와 지식이라면 좋은 생각이 있을 터인데요.”
“역사와 국가의 원리는 긴 시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도마 위에 올라있는 생선 같은 우리들에겐 지금 당장 칼날을 피할 수 있는 긴급한 술책이 필요할 뿐이오.”
모추가 몰풍스런 말투로 거들었다.
“방장 정도 되면 여기 있는 죄수들을 움직여 옥졸을 죽이고 파옥해 나가는 방법 따위 있지 않겠소. 허긴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오 년 동안이나 여기에 죽치고 앉아 있진 않았겠지만.”
명림원지가 헛헛 풋웃음을 웃으며 농처럼 말허두를 돌렸다.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러 일으켰듯 오늘 제가 폭우를 불러온 것으로 부족하오? 비가 내리는 동안 재미있는 옥중방담이나 나눠 봅시다.”
모추가 발끈했다.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옥중방담 같은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소?”
“옥중의 방담이란 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재미있고, 비현실적인 괴란쩍은 얘기들뿐이지요. 먼저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하지대왕께 여쭙겠습니다. 마마께서 여길 나가시면 무얼 하실 작정이십니까?”
하지대왕이 정중하게 말했다.
“먼저 박지에게 빼앗긴 대가야를 찾겠습니다.”
“그럼, 대가야를 찾은 뒤에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가야일통의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
“가야일통의 대업을 이룬 뒤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명림원지는 집요하게 하지왕에게 질문을 계속했다.
“글세, 그 이후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로부터 가야를 지켜내고 가야를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면 좋지 않겠습니까?”
“마마, 훌륭하시지만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럼,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명림원지는 쥐눈처럼 반짝이는 눈을 잠시 감았다.
옥중 밖에는 폭우가 가늘어져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와룡산은 짙은 구름에 잠겨 있고 사물성은 무거운 안개에 젖어 있을 것이다. 밤사이에 비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샐녘에 해가 난다면 그날로 하지왕 일행은 처형될 것이다.
명림원지가 옥졸과 형리, 죄수를 통해 밖으로 전한 전갈은 무사히 도착해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명림원지는 그것을 오늘 아침 들어온 형리와의 은밀한 수화를 통해 확인했다. 어두운 옥중에서 오 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지혜와 정력을 기울여 빚어낸 모사가 이제야 한줄기 빛으로 허공을 헤쳐 하늘에 닿는 환영을 보고 무량한 감개에 젖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이 비가 그치지 않고 닷새만 더 내려준다면......
명림원지는 감았던 눈을 뜨며 하지왕에게 말했다.
“대왕마마, 제 소견에는 가야일통은 대업이 아니라 중업입니다. 가야일통 이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일하는 사국일통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에게 그런 대업이 가당키나 하겠소?”
“그것도 대업이 아니라 중업에 불과합니다.”
모추가 명림원지의 말을 듣다듣다 화를 참지 못하고 대화 중에 끼어들었다.
“방장, 마마께서 방장의 말을 선선하게 들어주시니 갈수록 가관이구려. 무간 뇌옥에서 할 일 없이 앉아 있으면서 과대망상만 늘었는가보구려. 대가야를 찾는 것도 어렵거늘 사국일통이 중업에 불과하다니 그 무슨 개뿔 같은 소리요? 대업은 또 어떤 허풍으로 발괄하실지 궁금하오?”
명림원지는 모추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한 마디 했다.
“젊고 잘생긴 미남 장군이 입이 거칠기가 무쇠 톱날 같구려. 군주는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국가의 대강을 공유한 뒤에야 분명한 영을 세워 국가를 이끌 수가 있소이다. 하지대왕께서 이룰 대업이란 왜와 중국을 복속시켜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 진정한 대업입니다.”
명림원지의 말에 하지왕은 침묵으로 답했고, 모추는 기가 찬 듯 콧방귀를 꼈으며, 우사는 헛웃음을 웃으며 자조하듯 말했다.
“허허, 우린 사형수로서 한갓 추적거리는 비에 의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마당에 그대는 마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라도 된 듯한 기개이시군요. 말로야 중국의 삼황오제를 내 수하에 두고 세 마리 말을 모는 말몰이꾼과 다섯 수레를 끄는 말구종으로 삼지 못하겠습니까. 실현이 불가능한 말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요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나마 명림원지와 하지왕 일행이 서로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각방에 떨어져 있었기 망정이지 한방에 있었더라면 모추와 우사가 명림원지를 주먹으로 한 방이라도 먹일 기세였다. 그만큼 명림원지의 말이 과장되고 종작없어 보였다. 지금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고 대가야 회복이 절체절명의 과제인데 그것은 안중에 없고 22가야 통일을 소업이라하고 사국일통을 중업이라 떠들고 있으니 그 입이라도 쥐어지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지왕은 작은 명림원지의 쥐 눈에 빨려 들어갈 듯 호기심어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와륵선생이 말하는 대업은 무엇이란 말이오?”
“진정한 대업은 일본과 중국을 통일하는 천하통일입니다.”
우사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나가도 너무 한참 나가버린 것이다.
모추는 명림원지를 칠 듯이 쇠깍지 같은 팔뚝으로 목 창살을 쾅쾅 내리치기까지 하며 말했다.
“명림선생, 천하통일이라니 그게 말이오 말뚝이오? 빌어먹을 대업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이 창살이나 부수고 파옥하는 길이나 말해보시오.”
옥중 좌평인 수수보리가 분을 못 참는 모추에게 경고했다.
“여기선 한갓 문방인 주제에 우리 방장님에게 대들지 마시오. 함부로 방장님께 험한 행투를 하고 독한 혀를 놀리면 나 좌평이 징벌을 내리겠소.”
하지왕도 모추에게 엄하게 말했다.
“모추, 내가 명하겠네. 궁정에 가면 궁정의 법을 따르고, 뇌옥에선 뇌옥의 법을 따라야 하네. 우리를 보는 많은 눈들이 있으니 자중자애하시오.”
사물성 뇌옥은 와룡산이 굽이굽이 흘러내린 북편 산자락에 토굴을 파고 목창살을 질러 놓은 곳이었다. 어둡고 우중충한 뇌옥에는 비 때문에 노역을 나가지 못한 삼십여 명의 죄수들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신입인 하지왕과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천하를 호령하던 왕이라도 일단 뇌옥에 들어오면 개털이 되어 선배 죄수들에게 고개를 수그리고 국으로 처박혀 있어야 하는 것이 뇌옥의 법이다. 죄수들은 신입인 세 사람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마마”
모추는 하지왕의 말 한 마디에 꼬리를 내렸다.
하지왕이 명림원지에게 말했다.
“와륵선생, 소업, 중업, 대업을 아퀴지어 말씀하셨으니 어떻게 하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업과 중업과 대업, 세 가지는 가야의 문양 오동잎과 같아 각각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줄기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소업을 이루고 중업을 달한 뒤 대업으로 나아가는 순차적이 과업이 아니라 세 가지 위업을 한꺼번에 도모해야 합니다.”
“과연, 그렇군요.”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자가 딱 한 명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방법을 원용하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명림원지가 쥐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한 명이 누구인지 태사령 우사선생께서 말씀해 보시지요?”
우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춘추전국시대를 평정해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 아닙니까? 진나라왕 영정은 한, 연, 조, 초, 위, 제나라를 차례대로 정복해 최초로 중국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봉건제를 헐어 강력한 중앙집권제도인 군현제를 만들고 거리 무게 부피 등 도량형의 통일과, 화폐, 거궤, 문자의 표준를 시행하고, 만리장성을 쌓았으니 진시황제야말로 선생이 말하는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군주가 아니겠소?”
명림원지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오. 진시황이 진왕에 올랐을 때 진나라는 이미 전국 7웅 중 최강자였습니다. 그 증거로 진시황은 즉위하자마 관례대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여산에 우리 같은 죄수 70만 명을 동원하여 구덩이를 파고 거대한 지하궁전을 만들었습니다. 진시황은 이미 강대국 진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신국 여섯 나라의 썩은 삽짝문을 차고 쳐들어가 형식적인 중국통일을 이룬 것뿐입니다. 중국통일 뒤에는 폭군이 되어 백성의 고혈을 짜 아방궁을 짓고 반대하는 유생들을 책과 함께 묻어버린 분서갱유의 만행을 저질렀지요.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도 강대한 북방 기마민족인 우리 조선과 흉노가 두려워서 쌓은 것이고, 바다 건너 왜도 통합하지 못했습니다. 말년에는 자기 목숨조차 두려워 불로초로 기군망상하는 서복과 노생의 허황된 말에 속아 동남동녀 삼천 명을 발해만으로 보내었고, 불안에 떨며 쥐새끼처럼 밤낮으로 지하동굴로만 다녔으니 어디 천하통일을 한 군주의 용자가 한 톨이라도 보인단 말입니까.”
명림원지는 진시황에 대해 마지막으로 아퀴지어 말했다.
“진시황은 대업을 이루진 못했지만 다만 어린 13살의 나이에 보위에 올라 한비자와 이사를 등용해 법가로 나라의 기강을 세워, 신상필벌을 분명히 하고 전쟁에 공이 있는 자는 상하귀천을 불문하고 대우한 점은 하지대왕께서 대업으로 가는 길에 족히 거울로 삼을 만합니다.”
우사는 명림원지의 그럴 듯한 옥중유세에 그를 비난하던 마음이 조금씩 호기심으로 바꾸어갔다. 여전히 명림원지의 허장성세는 태산을 울릴 정도로 세지만 그가 소업 중업 대업을 자기의 소견대로 선명하게 말하고 중국의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는 언변은 실다운 지식과 지혜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사가 명림원지에게 말했다.
“진시황이 대업을 이룬 군주가 아니라면 한무제는 어떻소?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넘어 흉노를 정벌하고 동으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남으로는 남월을 복속시켜 신국으로 삼았으며 서로는 파미르를 넘어 장건을 파견하고 대완을 정복하여 땅은 고비사막에서 패강에 이르고 그 명성을 동서사방에 떨쳤으니 가히 대업을 이룬 군주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동중서를 등용하여 유가로 황노학과 법가를 누르고 만세의 기강으로 삼았으니 가히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군주가 아닐까 합니다.”
우사의 말에 명림원지는 역시 실망스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명림원지는 작고 둥글며 마치 어둠 속의 작은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쥐 눈을 말동거리며 말했다.
“한무제 유철은 진시황제 다음으로 중국인들이 존경해 진황한무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도 대업을 이룬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한고조가 초패왕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다음이라 약간의 변방 영토를 확장한 정복군주에 불과합니다. 유철이 무제라 불리는 이유는 북방의 강대국 흉노의 일부를 물리친 업적 때문이지요. 한나라는 건국 초부터 만리장성 너머 북방에는 있는 흉노의 신국이 되어 매년 거액의 조공과 황실의 공녀를 바치고 조알을 하면서 선우의 비위를 맞춰왔지요. 하지만 유철이 천자의 위엄을 개똥으로 바르고 있는 서북방 흉노족에 위청과 곽거병을 보내 고전 끝에 정벌해 겨우 흉노의 신국을 면한 것입니다. 하지대왕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가야와 신라의 김씨의 시조는 그때 수도 장안으로 온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손들입니다.”
하지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대가야의 태조 이진아시왕과 금관가야의 태조 김수로왕이 투후 김일제의 7대손이라는 걸 태사령 우사선생이 편찬한 가야서기를 보고 알았습니다. 따라서 나도 투후 김일제의 직계 후손입니다.”
엄격한 실증 사학자인 태사령 우사도 명림원지와 하지왕의 말에 동의했다.
“가락국기나 고기, 향전들을 보면 건국의 시조들은 한결같이 알에서 나오거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의 아들이라 적혀 있지만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 김알지왕과 가야 김수로왕, 뇌질주일(김주일)왕은 투후 김일제의 후손으로 십촌 형제간이지요. 역사에서 신비하게 꾸며낸 신화와 전설, 설화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고, 승자가 화려하게 미화한 거품을 다시 한 꺼풀 더 걷어내야 비로소 거짓 없는 인간의 알몸이 드러나지요.”
이러한 태사령 우사의 실증적 역사관은 금관가야에서 추방되는 계기가 되었고, 대가야 집사 박지가 태사령 우사를 가야의 역적으로 잡아들이는 빌미가 되었다.
명림원지가 우사에게 말했다.
“우사선생, 역사가 치장을 벗고 사실만 드러나게 되면 깡마른 여인의 알몸처럼 볼품없고 수치스럽지 않을까요? 사관이 판단하고 선택해서 입힌 선악, 미추, 진허의 옷마저 벗어버리면 토막토막 뼈다귀와 뼈다귀로 간신히 연결된 역사는 사실은 될지언정 기품 있는 진실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치열하게 대업과 역사에 대해 옥중 방담을 나누는데 옥문 입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배식!”
명림원지와 우사가 한무제를 얘기하다 사관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고담준론은 옥졸의 현실적인 말 ‘배식’ 소리에 중단되었다. 하루 두 끼 시작 중 아침을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옥졸이 열쇠로 맞은 편 옥방 문을 열자 배식당번인 텁석부리 모개와 곰보인 고두쇠가 나와 밥수레를 밀고 오면서 배식을 했다. 배식이랄 것도 없었다. 소금 간을 한 수수밥 덩어리를 한 개씩 던져주면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