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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19) 제3부 하지왕과 가야제국(7)

작성일 : 2021.05.23 08:59

대가야제국의 부활(19)

3부 하지왕과 가야제국(7)

김하기

 

모추와 우사는 망루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오라에 묶여온 자는 하지왕이 분명했다.

소아주가 하지왕의 목에 칼을 대고 소리쳤다.

모추와 우사! 칼과 창을 버리고 항복하라!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너희 주군 하지왕의 목을 베어 돼지우리에 던질 것이다.”

모추는 망루에서 창과 칼을 아래로 던져 버리며 말했다.

소아주, 난 오늘 네가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모추와 우사가 무기를 버리고 망루에서 내려와 묶인 하지왕에게 엎드렸다.

모추가 주먹을 부르쥐며 말했다.

마마, 소신이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해 황송하옵나이다.”

하지왕이 모추와 우사를 보며 말했다.

미안하오. 내가 어리고 힘이 없어 그대들을 잡히게 했소.”

소아주가 옆에서 이를 보다 홍소하며 말했다.

잘들 논다. 네 놈들이 나의 생일잔치를 망친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모추의 괴력을 경험한 병사들은 모추를 몇 겹으로 단단히 묶어놓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모추가 묶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잘 묶어. 나에게 틈을 주지 말고. 틈만 주면 다들 죽여버릴 테니까.”

이런 개새끼가!”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솟은 사물국의 병사들은 모추를 소가죽 자루에 담아 목만 달랑 내놓게 묶은 뒤에 마구 몽둥이찜질과 주먹질, 발길질을 퍼부어 분풀이를 했다. 그들은 모추의 온몸이 가짓빛으로 멍들고 얼굴이 피곤죽이 되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두들겨팬 뒤 모추를 성안 뇌옥에 쳐 넣었다. 모추를 처리한 소아주는 하지왕과 우사를 묶어 파흥해 시르죽은 잔칫상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소아주가 우사에게 말했다.

금관가야의 태사령 우사지? 제국회의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나와 같이 술을 했던가. 자네와 마신 술맛이 썩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이 나네.”

오늘도 술맛이 없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오.”

현상금이 두둑하게 붙은 세 사람을 잡았는데 술맛이 없을 리가 있겠나. , 다시 풍악을 울려라!”

가척과 악공과 무희들이 다시 들어오면서 우사와 모추의 난입으로 난장판이 되었던 연회장은 다시 흥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왜에서 건너온 기녀들은 샤미센 음악에 맞춰 치부만 구슬고쟁이로 가린 채 거의 알몸으로 춤을 추었다.

왜술에 취한 소아주가 하지왕에게 말했다.

하지대왕, 대가야 회령대왕의 아들로, 다시 한번 가야를 부활시킬 영명한 군주라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들었소이다. 하지만 이를 어쩌지오? 적지 않은 상금이 걸린 왕의 머리를 베어 부족한 사물성의 살림에 좀 보태겠소이다.”

하지왕이 소아주에게 웃으며 말했다.

소한기, 내 목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군문효수(軍門梟首, 죄수의 목을 베어 군영의 문 앞에 매어다는 일.)하시구려. 헌데 소아씨는 사물국의 오래된 명문가로서 그 명성이 자자한데 왜의 침공 소식을 듣고도 모른 척하여 명을 재촉하십니까?”

듣기 싫소. 우리 소아씨와 왜의 야마토와는 오래된 친구요. 우리 사이를 쓸데없이 이간질시키려는 자들이 많은데 지금 보다시피 왜가 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렇게 선물과 사절까지 보내지 않았소. 왜는 나를 부요하게 해주는 무역창고요, 무슨 왜의 침공이 있다는 거요?”

왜의 병근이 간을 파먹고 있는데도 우선 곶감이 달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하오. 언젠가는 내 말이 떠올라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오.”

하지의 말에 소아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부하들에게 명했다.

에잇, 이 작자들은 한결같이 술맛을 떨어뜨리는 자들이다. 하지와 우사를 당장 하옥시키고, 풍악을 세게 울려라.”

,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소아주의 사졸들이 하지와 우사를 모추가 먼저 들어간 사물성안 뇌옥에 집어넣었다. 하지왕과 우사, 모추는 감옥에서 다시 함께 모이게 되었다.

다른 옥방의 죄수들은 눈을 번들거리며 이들을 보다가 다시 감옥의 일상으로 돌아가 토스레옷을 벗어 빈대를 털어내고 이를 잡고 있었다.

하지왕이 우사와 모추에게 말했다.

당신들의 주군으로서 면목이 없소. 차라리 이 성을 지나쳐 곧바로 와룡산의 명림원지에게 갈 것을, 아둔하고 어리석은 소아주에게 무슨 왜가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전하고 충언을 하려고 한 게 애당초 잘못이었소.”

우사가 말했다.

가야를 짊어질 군주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기에 제가 간 것입니다.”

우사선생과 모추에게 미안할 따름이오.”

하지왕은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봐도 한심했다. 왕좌에 앉은 것은 잠시일 뿐, 가야를 알기 위해 여행길에 나섰다가 왕위를 찬탈당하고 이후, 도적의 산채와 적당의 소굴에서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상갓집의 개처럼 전전하며 돌아다니다 결국 가장 밑바닥인 뇌옥까지 굴러 떨어진 것이다. 대업을 이룬다는 구실로 우사와 모추를 거느리고 다니지만 실은 이들 둘도 아무런 힘도 지위도 없는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뜻한 바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이 결국 죽음의 나락에 떨어진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소아주는 셋의 목을 베어 박지에게 갖다 바칠 것이다. 셋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하지왕이 탄식을 했다.

와룡산의 와륵선생을 먼저 찾을 것을.”

그때 옆방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입들이 들어왔으면 방장에게 신고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왕이 창살너머 목소리의 주인공인 죄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눅눅한 기운이 돌고 쥐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어두컴컴한 옥사였다.

난 이 뇌옥에서 가장 형량이 높고 오래된 방장 죄수지.”

우사가 말했다.

얼마나 형량을 받았습니까?”

십년이지.”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을 받으셨습니까?”

살기는 절반인 오년을 살았지.”

그제야 셋은 방장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오 년 동안 하늘을 보지 못하고 음습한 동굴과 같은 곳에 갇혀 있는 방장의 얼굴은 마치 백납같이 희고 초췌했다. 뼈다귀가 불거지고 야위고 쇠약한 방장의 모습이지만 눈만은 형광물질을 바른 듯 번들거렸고 말은 굵고 힘이 있었다.

그럼, 무슨 죄목으로 들어오셨는지?”

그때 방장 옆에 앉아 있는 봉두난발의 죄수가 셋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신입들이 먼저는 신고식은 않고 우리 방장님을 먼저 다루려는 것인가! 어서 무릎을 꿇고 방장님께 삼배를 올려라!”

모추가 분을 삼키지 못하고 말했다.

이 분은 대가야의 대왕, 하지왕이시고, 여기는 태사령 우사이시네. 그리고 난 이 분들의 호위무사 모추다. 어찌 한갓 도적놈들인 옥중 죄인 따위에게 삼배를 올리겠는가.”

그러자 봉두난발이 껄껄껄 웃었다.

무시기 왕이라고? 꾀죄죄한 네 놈들이 왕이고 관리라면, 이분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고 난 신라의 실성왕 쯤 되겠다. 푸하하하하.”

하지왕이 말했다.

옥중에는 옥중 규율이 있는 법, 나도 일단 죄수로 들어왔으니 그 규율에 따르겠소.”

하지왕이 말을 마치자마자 죄수의 고참인 방장에게 삼배를 올렸다. 왕이 올리니 우사와 모추도 하릴없이 왕을 따라 미적미적 삼배를 올렸다.

삼배를 받은 방장이 말했다.

이제 절을 받았으니 내가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적당한 옥중 품계를 하사하도록 하겠다. 이곳의 시간은 소털처럼 많으니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라.”

방장의 말에 우사는 빈정거리고 모추는 화를 냈지만 하지왕이 방장에게 자신이 걸어온 삶을 솔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한 때 저는 대가야의 왕이긴 했소이다.”

여기 들어온 사람치곤 왕년에 한 가락 하지 않은 자가 없지. 일단 그렇다 치고.”

하지만 왕으로 자리에 앉은 건 잠시일 뿐, 왕위를 찬탈당하고 이후, 도적의 산채와 적당의 소굴을 전전하며 동가식서가숙하다 결국 여기 뇌옥까지 굴러 떨어진 것이오.”

 

뇌옥의 방장에게 하지왕과 우사, 모추는 차례대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세상과 차단된 뇌옥이라는 어두운 공간이 주는 아늑함과 편안함이 있었다. 어떤 것에도 노출되지 않고 어떤 검증도 필요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는 거짓과 과장도 섞여 있지만 갇힌 자의 한풀이이자 자존심의 표현이자 존재의 이유이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은밀한 속마음까지 털어놓으며 죄수의 동질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 갇힌 자들에게는 이야기는 자기위안이며 지금 살아 있다는 존재의 확인이기도 했다.

방장이 셋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방장이 말했다.

결국 셋은 석공스님의 말을 듣고 와룡산의 와륵선생을 만나러 가다가 이런 변고를 당했네, 그려.”

그렇소이다.”

셋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천하의 돌중 말에 셋은 완전히 속은 것이군!”

석공대사가 돌중이라뇨?”

와룡산에는 와륵선생이 없소이다.”

? 그럴 리가.”

가장 놀란 것은 하지왕이었다.

그럼, 명림원지라는 와륵선생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자 방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바로 당신들이 찾던 와륵선생이오.”

옆에 있는 봉두난발의 죄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방장님의 함자가 명림원지가 맞고, 이 일대에서 와룡산 와륵선생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이오.”

모추가 방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아니, 당신이 와륵선생이라니 말이오 말뚝이오? 명림원지는 지금 산자수명한 와룡산 백천에 옥골선풍의 선비로 신선처럼 살고 계신단 말이오. 헌데 와륵선생이 감방의 죄수두목인 당신이라니, 제석항아리에 마신(馬腎, 말좆)이 들어가도 유분수지 감히 당신이 와륵선생을 사칭하다니 진정 내 손에 맞아죽을 작정이오?”

방장이 좌정한 채로 웃으며 말했다.

그 땡초 석공이 아마도 나를 과대평가했든지 아니면 당신들을 놀릴 작정이었던 같소이다.”

우사도 비아냥거리며 방장에게 말했다.

석공스님을 돌중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당신이 와륵이라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부인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가 만난 석공스님은 능히 하지대왕의 왕사로 삼을 만한 견문과 학식, 능력을 갖춘 고승이었소. 헌데 자신을 와륵에 비하면 태양빛에 반딧불이나 다름없다고 낮추며 와륵선생을 우리에게 추천했소. 그러니 정말 당신이 와륵선생이 맞다면 석공스님을 돌중이니 땡초니 하며 폄하하지 않을 것이오.”

방장이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석공을 돌중, 땡초라는 말은 스님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이지 왕사로서의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니 그리 괘념치는 마시오.”

하지만 하지왕도 방장의 말이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석공스님이 와륵선생에 대해서 과찬을 하거나 놀림거리로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의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었다.

석공스님은 분명하게 말했다.

제가 하지대왕의 왕사로서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사물국(현재의 사천) 와룡산 백천에 살고 있는 명림원지라는 분으로 명성이 높아 와륵선생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저는 그분에 비하면 태양빛에 반딧불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분은 저보다는 열배나 현명한 분입니다. 주무왕의 강태공, 한 유방의 장량, 고국천왕의 을파소, 촉한의 제갈량의 맥을 이을 만한 인재입니다. 제가 서서 겨우 백리를 본다면 그는 앉아서 천리를 보는 분이지요.”

천번만번 양보해서 사물성 뇌옥에 갇혀 있는 것을 와룡산 백천에 살고 있다고 에둘러 말했다 할 수 있다. 사물성 뒷산이 와룡산이고 그 산자락이 백천이기 때문에 와룡산 산자락에 자리 잡은 사물성의 뇌옥이 위치 상 그리 틀린 곳은 아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방장이라는 이 죄수는 풍채라고는 없었다. 겉모습이 듬직한 석공스님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석공스님은 운수행각으로 햇볕에 탄 검붉은 얼굴과 유난하게 길고 짙은 눈썹 살이 튀어나왔으며, 좌정한 모습은 태산과 같았으며 눈빛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을 듯 날카롭게 빛나 능히 왕사로서 손색이 없었다.

헌데 자칭 와륵선생이라고 주장하는 방장은 꾀죄죄하게 들피진 몸에다 얼굴은 광대뼈가 솟아나와 강파르고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장애라도 앓고 있는 듯 목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척추가 약간 뒤틀려 있었다. 그의 관상과 몸 어디에도 강태공, 장량, 을파소, 제갈량의 맥을 이을 지혜가 엿보이지 않았다. 다만 설득력이 있는 남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약간 튀어나온 듯한 짱구 이마, 어둠 속에서도 쥐눈처럼 반짝이는 작은 눈이 모사를 칠 만한 재기가 있을 듯 보였다.

방장이 셋에게 말했다.

지금 너희 셋의 삼배를 받고,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곳의 좌장으로서 너희 셋에게 옥중 품계를 하사하겠다. 먼저 하지왕이라는 자는 어리지만 역량과 지도력이 있어 보이니 옥중 죄수들의 군기와 질서를 담당하는 정찰의 지위를 주겠다. 우사는 학식과 업무능력이 엿보이니 죄수들의 민원을 담당하는 민통의 직을, 모추는 옥졸의 동향을 파악하고 죄수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문방의 역할을 주겠다. , 너희 정찰, 민통, 문방 셋은 나를 보좌하는 좌평 수수보리의 명에 따라야 한다. 알겠는가?”

모추가 방장을 비웃으며 말했다.

사기꾼, 도둑놈의 주제에 우리를 뭘로 보고 하대하며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가. 차라리 방장 당신이 우리들의 발을 닦아주는 발당이나 하지 그래.”

점잖은 태사령 우사도 분을 참지 못하며 방장에게 사기꾼 도적놈이라며 욕을 퍼부었다.

하지왕이 모추와 우사의 욕설을 제지하며 방장에게 말했다.

방장, 무례를 용서하시오. 헌데 만일 그대가 정말 명림원지가 맞다면 그대의 조상, 명립답부를 잘 알겠구려.”

방장이 하지왕에게 말했다.

고구려 신대왕 때의 국상 명림답부(명림답부(明臨答夫, 67~179): 고구려 7대 차대왕을 제거하고, 차대왕의 아우 백고를 신대왕으로 세운 인물.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었고, 뛰어난 지략과 청야전술로 한나라 대군을 물리친 명장임.)는 우리 명림가문의 중시조이시고, 동천왕 때 국상 명림어수는 나의 현조가 되시지요. 하지만 나에게 가문은 짐이 될 뿐이오.”

훌륭한 가문은 영광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지요.”

뇌질왕가에서 태어나 가문의 영욕을 온몸으로 경험한 하지왕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고조부 때 우리 가문이 역모에 연루돼 집안이 모조리 숙정당한 뒤 살기 위해 찾은 땅이 바로 반도의 남쪽 끝인 가야의 사물국이었소. 이후 우리 명림가문은 불가근불가원이라는 가훈을 정하고 일절 정가에는 나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지요.”

헌데 방장은 무슨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갇혀 오랜 세월을 지내고 있는 것이오?”

원칙은 어기라고 있는 것 아니겠소? 난 가훈을 어기고 사물국에 출사했지요.”

방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명림원지는 와룡산 백천에서 아버지 명림근사와 어머니 소아숙 사이의 3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병치레로 몸이 허약했던 그는 의원과 약방으로 다니면서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나이 일곱에 열병에 걸려 몸이 뒤틀리고 사경을 헤매게 되자 부모는 마지막 수단으로 절을 찾았다. 절의 스님이 아이가 살 수 있는 길은 출가시켜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그 길로 와룡산 백천사에 동자승으로 출가시켰다. 이후 그는 열이 떨어지고 차츰 건강을 회복해 절에서 정진하고 공부해 오도의 깊은 세계로 들어갔다. 이후 명산대찰의 고승을 찾으며 불법을 논했는데 어린 나이의 그를 가르칠 자가 없을 정도로 높은 선지식이 되었다.

석공은 지리산 칠불사에서 동문수학한 도반이었다. 석공은 왜구 침입으로 가족을 잃자 승병으로 출전해 살인계를 범하고 파계해 파락호가 되어 있었다. 그런 석공에게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고 권유한 자가 바로 명림원지였다. 둘은 중국 종남산에서 금강법사 밑에서 용맹정진하여 약관 19세에 불승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석공은 금강법사의 명을 받아 천축으로 떠났고, 명림원지는 이상에 치우친 불법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 국학에 들어가 공맹의 도인 유가와 한신의 법가, 손오의 병법을 두루 섭렵한 뒤 사물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중국에서 온 지식인으로 명성을 떨친 데다 어머니 소아숙의 인척 인연으로 해서 사물국에 황색 조복을 입는 7품 읍차로 출사하게 되었다.

소아주의 형인 한기 소아장은 권력욕은 강하나 암둔하면서도 난폭한 군주였다. 아버지가 죽은 뒤 한기직을 물려받은 그는 동생들을 모두 죽여 아버지와 함께 순장시키고 충언을 하는 충신들도 함께 부왕의 묘에 생매장시켰다. 다만 일찍 출가해 권력에 뜻이 없는 막내 동생 소아주만은 목숨을 살려주고 7품 읍차인 명림원지로 하여금 그의 행동거지를 감시하게 했다.

명림원지는 폭군 소아장의 횡포에 치를 떨었다. 더욱이 충실하게 소아주를 감시하는 자신마저 의심하는 눈치였다.

하루는 소아장이 명림원지를 불러 말했다.

읍차, 명림원지는 고구려 출신이라 가야의 순장제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아닙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면 우리의 장례풍속인 순장제도를 낡은 것이라 경멸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상하의 기강을 세우는 데 이보다 좋은 제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반역죄인인 소아주를 감시하라고 했는데 감시는커녕 충성을 맹세해 소아주와 함께 생매장 당하기를 원하는가?”

결코 소아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습니다. 저의 주군은 오로지 소아장 한기님뿐입니다.”

거짓말! 세작으로부터 네 놈이 소아주에게 우리나라의 금서인 맹자의 역성혁명을 강론한 적이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정녕 무슨 속셈으로 세상 물정 모르고 망둥이처럼 날뛰는 소아주에게 함부로 맹자를 가르쳤단 말인가.”

주군, 맹자를 설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맹자의 핵심은 왕에 대한 충의와 도덕적 수신입니다. 승려의 본분을 모르고 술을 즐기고 여색을 탐하는 소아주에게 경계의 의미로 강론한 것뿐입니다.”

넌 나를 네 궁둥이이나 걸치고 쉬었다 가는 평상쯤으로 생각하는가! 내가 병신인 너를 읍차로 등용해 출사시킨 것은 너의 원숭이 같은 잔꾀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번 한번은 넘어가지만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한다면 순장의 껴묻거리가 될 각오를 하렷다!”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극히 삼가고 또 삼가겠나이다.”

명림원지는 이때부터 소아장을 죽이고 사물국의 한기를 소아주로 갈아치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소아주에게 소아장을 죽일 기회를 만들자고 모사를 쳤다. 소아장이 아끼는 애첩이 백천사에 제를 드리러 올 때 강제로 범하는 척하라고 말했다. 소아주가 소아장의 애첩을 범하려하자 현장에서 병사들로 하여금 소아주를 묶어 곧바로 소아장에게 끌고 갔다.

애첩이 소아장에게 백천사에서 일어난 정황을 울면서 설명하자 소아장은 대노해 당장 대역죄인 소아주를 죽여라고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그때 소아장의 곁에 있던 명림원지는 소매에 숨겨간 단검을 꺼내 소아장의 목을 찔러 죽이고 소아주를 한기로 하는 정변을 성공시켰다. 정변의 일등공신이 된 명림원지는 단숨에 7품 읍차에서 2품인 축지로 5품계가 상승하며 소아주의 최측근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권력을 손에 쥔 소아주는 언제 명림원지가 형을 죽이듯 자신을 죽이고 또 다른 정변을 일으킬지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했다. 결국 소아주는 명림원지가 역모를 꾸미고 소아주를 죽이려 조당에 칼을 품고 왔다는 누명을 씌워 뇌옥에 처넣은 것이다.

명림원지가 하지왕에게 말했다.

소아주를 죽이려고 조당에 칼을 품고 들어갔다는 것이 그들이 꾸민 역모죄인데 정작 내가 품고 들어간 것은 칼이 아니라 소아주에게 진상하러 들고 간 오키나와산 야광국자였소.”

 

명림원지의 이야기에 하지왕도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명림원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정도의 모략과 무공담 정도로 석공스님이 그를 태양에 비유하며 강태공, 장량, 을파소, 제갈량의 맥을 이을 만한 큰 그릇이라고 말한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명림원지는 자신의 안위와 출세를 위해 자신을 등용한 주군마저 시해하는 이기적인 모사꾼이나 야심 많은 간웅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자의 국량이란 대가야의 집사 박지나 비화가야의 건길지, 기껏해야 금관가야의 너구리 이시품왕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대업을 이루는 데는 차라리 석공스님이 인품이나 경륜, 역량이 명림원지보다 훨씬 낫지 않는가.’

인물평이 날카로웠던 석공스님이 왜 명림원지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사와 모추도 하지왕과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결국 명림원지는 어릴 때 남보다 좀 명석했고, 외국물을 조금 먹어 판세를 읽는 상황 판단이 빨랐을 뿐, 더불어 대업을 이룰만한 큰 인물은 못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지왕은 예의를 갖춰 명림원지에게 절하며 말했다.

방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석공스님이 추천한 와룡산의 와륵선생이 분명한 듯합니다. 우리들이 그동안 간절히 찾아뵙기를 원하던 선생을 뜻밖에도 이곳 감옥에서 뵙게 되니 큰 광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디 부족한 저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우사와 모추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명림원지가 석공스님이 말한 진짜 그 와륵선생이 맞는지 아닌지를 살피고 있었다.

명림원지가 뜻밖에 하지왕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대왕마마께서 옥중삼배로 부족한 저를 맞아주셨으니 더 이상의 절은 필요 없습니다. 이제 제가 신하된 도리로 큰 절을 올리겠습니다.”

명림원지는 하지왕에게 큰 절을 올린 뒤 돌변한 태도로 공손하게 말했다.

대왕마마, 지금까지 한 저의 무례한 행동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방장님께서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시는지.”

저는 하지대왕 마마께서 이 뇌옥으로 들어오실 것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석공스님으로부터 받은 통기도 있었지만 이 난세를 보고도 성을 그냥 지나친다면 제가 모실 영명하신 군주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난 오년 간 이 감옥에서 오로지 하지대왕을 만날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습니다.”

“......”

하지왕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우사가 의아한 듯 말했다.

방장님, 하지만 바구니 안에 든 마른 생선 같은 우리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내일 아침이면 우리 셋은 망나니에게 수급이 베어져 대가야의 박지에게로 보내질 것입니다. 이 죽음의 뇌옥에 갇혀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명림원지가 비틀어진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