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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용의 시 읽기

<양왕용의 시읽기 31> 册

작성일 : 2021.05.20 03:15

김성춘

 

책 정리를 했다. , , , 책 속에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압도적인 책들에 내 정신

얼마나 압도당했을까 너무 많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먼지 낀 책

갈피에서 엽서 한 장, 툭 떨어진다

사랑하는 아버지께, 방금 니스 해변에서 돌아왔습니다 붉은 달과

아름다운 노을을 보니 불현 듯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2006.

훈 올림, , 열 번의 계절이 압도적으로 지나갔구나 내 것이 아닌 저

계절들, 저 헌 책들, , , , 책들,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아

무리 찾아도 책 속에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어린 코끼리 한 마리 아직

도 풀섶에서 토끼풀을 찾고 있다 책 속에 길은 없다 길은 항상 견인차

처럼 멀리 있다 길은 사랑처럼 멀리서 온다 어린 코끼리 책을 베고 잠

들어 있다 숨소리가 가쁘구나 어둠 속에서 소쩍새가 울고 어린 코끼리

한 마리 어디론가 혼자 가고 있다 건강 잘 챙겨라 건강, 다시 책 정리

를 한다 붉은 달이 서서히 꺼지고 사방이 금세 어둑어둑 해 지고 있다

-시와 사상(2016년 가을호)발표

 

김성춘(경북, 경주) 부산 출신,1974년 월간심상으로 등단, 시집방어진 시편,

물소리 천사, 경상남도 문화상, 가톨릭문학상 , 최계락 문학상 등 수상,

부산대학교 교육 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졸업, 울산 무룡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현재 경주 동리목월 문예대학 시 창작반 강사

 

김성춘 시인의 시는 지금까지 감각적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경향이었다. 특히 2011년 펴낸 11번째 시집 물소리 천사는 그러한 점이 절정을 이루의 7순을 앞 둔 노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그는 이 시집으로 <최계락문학상><가톨릭 문학상>을 받았다. 모 평론가는 그를 김소월과 김춘수의 중간 지점에 있다고 하여 서정성과 환상적 감각성을 두루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추천작 에서는 감각성보다 일상성을 바탕으로 상징적 사물을 등장시켜 관념의 경지를 벗어난 많은 사유를 하게 하는 데에 이르고 있다.

이 작품은 그 동안 소장해온 책들을 정리하면서 10년 전에 아들이 유럽 여행에서 보내온 엽서를 발견하는 것을 주 모티브로 하여, 살아오면서 읽은 책들과 읽지 않고 쌓아 둔 책들을 통해 그의 그 동안의 지적 사유와 어쩌면 40년 넘은 시작 행위를 반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환상적 이미지인 코끼리를 등장시켜 감각성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 코끼리가 상징성 또한 가지고 있다. 10년 전 여행길에 엽서 한 장을 보낸 시인의 아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도 어린 코끼리로 보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많은 시어들과 행간에 숨어 있을 수 있다. 물론이 코끼리를 시인 자신으로 보아 70년 넘게 살아온 지난 날의 가톨릭 세계관에 입각한 반성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시의 시어나 이미지 자체의 내포는 깊은 상징성과 긍정적 애매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 시는 그의 시세계의 또 하나의 변모를 예감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양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