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양왕용의 시 읽기

양왕용의 시 읽기

<양왕용의 시읽기 28> 한창옥의 수묵화

작성일 : 2021.04.22 12:39

수묵화

 

한 창 옥

 

무심한 듯 롱패딩을 걸치고

깊은 주머니 속의 하얀 수런거림을 듣는다

뜨겁게 커피를 나눠 마시며

지하철 계단을 지나 광장 속으로

희고 검은 펭귄들이 뒤뚱거리며 간다

침묵처럼 내리는 눈발 어쩌면 슬프다

스쳐 지나간 발자국 따라

세상은 흰빛 아니면 검은빛

흑백 장면의 필름이 돌아간다

붉은 부리의 펭귄 한 마리 시절을 가로질러

뒤뚱거리는 걸음 변치 않을 것 같은

긴 파장이 차마 위태롭다

희고 검은 롱패딩 자락 펄럭이는 거리에

반짝이는 눈발은 어느 시대의 아이콘인지

지금 잠꼬대 같은 한낮의

희고 검은 수묵화 한 점 그린다

- 20184월호월간문학

 

한창옥; 2000년 시집다시 신발 속으로로 등단. 작품활동 시작, 시집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내 안의 표범, 시전문지포엠포엠발행인

한창옥 시인은 당차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류시인이다. 부산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체재가 스마트하고 내용이 충실한 시전문지포엠 포엠을 출판사 포엠 포엠을 맡고 있는 아들과 함께 만들며, 서울 송파 출신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송파다리밟기의 제정에 공이 큰 인간문화재 선친 한유성(1908-1994)옹을 기념한 문학상을 송파구청의 후원으로 제정하여 운영한다.

2017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그래서 검은 롱패딩이 유행했다. 거리를 누비는 롱패딩의 물결과 강추위 속에 내리는 눈발은 마치 남극의 풍경 즉, 펭귄들의 행렬과 같았다. 이러한 점을 착안한 작품이 수묵화이다. 1-5행까지는 롱패딩 무리들이 뜨거운 커피를 나눠마시며 걸어가는 모습을 다소 감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6행에 풍경 즉 내리는 눈발에 슬프다라는 정서를 이입시키면서 7행부터 12행까지는 그들의 행렬을 다소 시니컬한 어조로 풍자한다. 13행부터 끝까지는 그들의 모습의 배경이 되는 눈 내리는 거리의 풍경을 역시 시니컬한 어조로 풍자한다. 그 풍자의 극치는 마지막 2지금 잠꼬대 같은 한낮의/ 희고 검은 수묵화 한 점 그린다라는 부분이다. 이러한 한국화와는 거리가 먼 풍경을 수묵화로 규정하고 시의 제목으로 사용했다는 것 자체는 거의 역설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리 풍경에 대한 풍자시이면서 다소 감각적이고 풍자와 역설적인 어조로 인하여 이 시는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마치 한창옥 시인의 분주하고 긴장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도 같다. <양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