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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4.13 11:35
우리들의 일그러진 풍경
1.
중앙 도서관에서 대운동장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을 따라 늘어선 벚나무에서는 막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벚나무에 둘러싸인 테니스장에서는 노란 공이 쉴 사이 없이 퉁겨지고 있었다. 그 테니스장을 빤히 내려다보는 벤치에는 두 여자가 떨어져 앉은 채 각기 튀는 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연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는 화사한 봄 풍경에 그런대로 어울리는 듯했으나, 수수한 청바지 차림에 두툼한 책을 무릎에 올려놓은 여자는 어딘가 표정이 무거워 보였다.
한 삼십 분 전 원피스의 여자는 운동장에서 올라왔고, 청바지의 여자는 도서관에서 내려왔다. 둘은 20미터 전방에서 서로를 봤다. 원피스의 여자는 청바지를 입고 오지 않는 것을 후회했고, 청바지의 여자는 연두색의 원피스가 날씨와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10미터 전방에서 둘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른한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착시현상인지 영락없이 학부 초년생이었던 원피스가 대학원생급 이상으로 변해 있었고, 테니스공보다 더 발랄하던 청바지가 볼링공처럼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여자가 한 번 더 고개를 갸웃, 한 것은 서로가 무척 낯익은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선지 약속이나 한 듯 그 의자에 같이 앉은 것이었다.
2. 3시간 전
“웬만하면 그냥 다니거라...”
“그깟 학교에 돈을 내고 어떻게 다녀요.”
백양은 어머니에게 톡 쏘아붙이고 집을 나섰지만 못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에게 너무했다는 생각보다는 딸을 동정하는 그 눈빛이 견딜 수 없었다. 서울대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올해는 자존심을 구겨가며 지방 명문대라는 K대에 지원했으나 거기마저 떨어져 마지못해 장학금을 준다는 삼류대학에 등록을 했다. 하지만 장학금도 받지 못했다. 자신이 아무리 3등급이라 주장해도 학교 측이 제시한 수능통지표는 4등급이었다. 백양은 전산착오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전산착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여고시절 모의고사에서부터 올 수능시험까지 줄곧 자신의 예상 점수보다는 턱없이 모자라게 나왔던 것이다.
“엄마 때문에 남사시러버서 못 살겠다.”
“어머머, 얘는... 엄마가 부엌 아줌마면 좋겠니?”
아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제 엄마와 찌부러진 소금자루처럼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제 아비를 번갈아 눈흘기다가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으로 항의를 대신했다. 박 사장은 아들로부터 처음 당하는 모멸감보다도 우선 아내의 그 닭살 돋는 서울말씨에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쫌, 편하게 삽시다.”
하지만 그의 불만표시는 아들에 비하면 그 강도가 한참이나 약했다. 아니 약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물이 들어도 단단히 든 김 여사 입장에선 오히려 역공의 빌미만 제공한 샘이었다.
“편한 것도 좋지만 당신, 그 꼴이 뭐예요. 정말 남사스러운 것은 바로 저예요. 머리에 염색도 좀 하구, 유행하는 옷도 좀 사입구...”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한번 터지기 시작한 잔소리는 끝이 없었을 것이다. 교양어를 쓴다지만 억양만 교양이요, 내용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오히려 아니래도 닭살 돋는 그 서울말씨의 잔소리라는 것은 금방이라도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누구라고요? ”
박 사장은 굵직한 남자 목소리의 ‘김다연’씨를 부탁한다고 했을 때 잘못 걸린 전화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아내의 새로운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김 여사의 본명은 ‘김덕자’였다. 촌스러운 이름이다 하여 시를 배우러 다니면서 새로운 이름을 쓴다고 했다.
김 여사가 잔소리를 중단하고 도끼눈을 하며 전화기를 빼앗았다. ‘김 여사’라는 말도 듣기를 싫어하는 그녀가 ‘김덕자’ 그 촌뜨기 이름을 그대로 달고다닐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3.
나른한 봄햇살 아래 조는 듯이 앉아 있는 김 여사와 백양은 어쩌면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백양이었다.
“시인이세요? 언닌...”
“어머, 그렇게 보여요? 그쪽은 법대생?”
김 여사는 시인과 언니라는 말에 무척 고무되어 시집을 끄집어냈고, 백양 역시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온 전시용 두툼한 책을 폈다. 그러나 두 여자의 눈길은 책 쪽으로 고정되지 못했고, 서로에게 곁눈질을 하다가 몇 번씩 눈길이 마주쳤다. 마침내 두 여자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김 여사가 백양 쪽으로 한 엉덩이 다가가자 백양 역시 다가앉았다.
“우린 분명 알고 있는 사이죠?”
“그래, 많이 닮은 것 같애...”
한동안 골똘히 기억을 더듬던 두 여자는 거의 동시에 아, 하며 상대를 봤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전생’과 ‘공주’가 아니었을까.
“전 아줌마가 마흔이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언니. 너무 실망 마세요. 최소한 20미터 전방에선 완벽한 아가씨니까요.” <박명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