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7) 제2부 하지태왕의 성장 2

작성일 : 2021.03.01 10:49 수정일 : 2021.03.08 10:04

대가야제국의 부활

 

하지태왕의 성장(2)

김하기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동안 내가 바친 뇌물이 얼마인데.’

박지는 고상지 도독에 대한 실망이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지난 번 자기의 아들 구야를 꺽감으로 대신해 고구려에 올린 것에도 뒤통수를 맞았는데 이번 금관가야와의 전쟁에서는 고상지가 자기 아들 구야를 뽕아로 썼다는 것이다.

아무리 급박한 전시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해서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구별이 있는 법, 고 도독은 이미 금도를 넘어 버렸다.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대가야의 집사 혹은 경우에 따라 왕으로 임명될 수 있는 자기의 아들 구야를 한낱 고구려 장수의 똥을 닦는 밑씻개로 썼다는 것에 대한 모멸감은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을 감추기는커녕 마치 거지밥상의 술안주처럼 자랑하고 다니며 박지 가문을 모욕하는 데는 인내의 한계를 느꼈다.

그것은 그래도 재산에 축이 나지 않으니까 참을 만했다. 박지는 허공을 치는 명예보다는 실익을 취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박지의 인내를 극한 사건은 대가야의 방어선을 치기 위해서 성벽을 쌓는데 알토란같은 자신의 문전옥답의 절반이 들어간 사건에는 불같이 화를 내었다. 물론 어라성을 중심으로 사대문을 만드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으나 자신의 주장을 일언지하에 묵살하고 후누의 주장대로 가야천을 따라 사대문 성곽을 쳤는데 그만 그의 금싸라기 같은 땅이 절반이나 먹혀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금관가야와의 내전에서 12가야 중 9가야를 잃고 겨우 다라가야와 성산가야만 살아남아 이번 전쟁에서 패전의 쪽박을 차고 말았다.

이건 내 아들을 뽕아로 사용하는 것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다. 전쟁에 진 것도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내 땅이 성곽 밑으로 먹혀들어간 것만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고 도독의 모가지가 고양이 목처럼 아홉 개가 되어도 다 베어내어야 속이 시원할 것이다.’

박지는 그동안 미뤄왔던 고상지 도독의 비위사실과 반역사실을 보고서에 낱낱이 적어 발 빠른 전령의 손에 쥐어주고 고구려의 장화황후 앞으로 달리게 했다.

 

광개토대왕은 남진을 하기 위해 국내성의 보기군을 이끌고 내려와 평양의 영명사에 머물고 있었다. 영명사는 태왕이 즉위와 동시에 평양에 불사를 시작한 9개의 절 중 가장 위용이 크고 아름다운 절이었다. 좌우로 펼쳐진 기와지붕들이 황새처럼 날개를 쭉 펴고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를 잊은 듯 광개토대왕은 태자 거련과 딸 상희, 그리고 꺽감을 비롯한 고구려에 볼모로 온 질자들을 평양 영명사로 불러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고구려에 온 질자들은 가야의 대장군의 아들 꺽감, 백제 아신왕의 딸 다해, 신라 내물마립간의 사촌동생 실성, 후연의 모용제였다. 그밖에도 각나라에서 고구려로 끌려온 왕자, 공주, 귀족의 자제들이 영명사 대청마루에 모여 광개토대왕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질자는 사실상 속국과 신국 등 이웃나라를 불신하는 데서 인질로 잡아두는 일종의 겁박행위이다. 태왕도 그런 의미로 잡아두고 있다. 하지만 태왕이 이들을 소중하게 여겨 교육을 시키는 것은 질자를 통해 국가 간 군신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전쟁을 방지하고 장차 태자 거련의 시대에 이들이 태자를 도와 고구려와의 우호관계가 지속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태왕은 공자의 논어를 꺼내어 보며 말했다.

내가 문제를 하나 내보겠다. 하인으로부터 마구간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희들이라면 무엇을 먼저 묻겠는가?”

거련이 먼저 대답했다.

그야 마구간에 불이 났으니 당연히 말이 타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먼저 물어볼 것입니다.”

거련, 잘 말했다. 당연히 이치에 맞는 말이다.”

태왕은 거련을 칭찬하면서도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생각을 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혹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때 신라의 질자 실성이 말했다.

공자께서는 마구간에 불이 났을 때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냐 물어도 말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도 않았습니다.”

, 실성은 미리 논어를 읽었군. 공자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지?”

말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신라의 실성군은 역시 사람을 중시하는 공자의 생각을 정확히 읽었군.”

그때 꺽감이 손을 들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가 만일 공자라면 먼저 사람에 대해 묻고 그 다음에 말에 대해서도 물었을 것입니다.”

왜지?”

말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진 소중한 존재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매우 유익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꺽감이 네가 마감이기 때문이라서 말을 소중히 여기는가?”

그러하옵니다. 말이 불에 타 죽으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굿간이 얼마나 많이 탔으며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물어 장차 그러한 화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토록 하겠습니다.”

태왕은 꺽감의 대답이 기특해 무릎을 칠 뻔 했지만 끙하고 신음소리를 내었다. 아들 대신 꺽감이 약동하는 물결처럼, 전진하는 수레바퀴처럼 무섭게 치고나가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거련이 실성 정도는 가볍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태학의 서가에 꽂힌 책에서 기반한 지식 정도는 둔탁한 지혜로도 능히 이길 수 있다. 실로 두려운 학생은 책을 읽어 지식을 쌓는 학생보다 스스로의 사고로 생명력을 비축하고 자신의 정열을 믿는 꺽감 같은 학생이다. 책을 꿰뚫는 안광의 지혜는 극히 위험한 것으로 관중이나 안영 제갈공명과 같은 신산귀모의 책사를 곁에 두지 않으면 제왕학을 체계적으로 배운 거련도 능히 당할 수 없으리라.

 

꺽감은 볼모로 온 질자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그 중 백제의 다해 공주는 자기도 모르는 기이한 감정으로 좋아했고, 신라의 실성은 이름 그대로 약간 실성할 정도로 특이한 생각을 들려주는 큰 형님으로 따랐다. 실성은 내물왕의 사촌동생으로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가 내물왕보다 비상하게 뛰어난 데나 인물마저 훤칠하여 내물왕이 시기하던 중 고구려가 신라에게 볼모를 요구하자 냉큼 질자로 올려 보내버린 경우다.

꺽감이 실성에게 말했다.

형님, 나도 어릴 때 신라 달천에서 산 적이 있소.”

그래? 그 쇳덩어리 마을에 살았단 말이지?”

맞아요. 쇠를 녹이는 가마도 여럿 있고 그랬어요.”

쇠둑부리에서 함께 놀던 귀여운 소라의 얼굴도 꺽감의 눈망울에 살포시 떠올랐다.

달천은 철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만드는 철장마을이어서 백제, 가야, , 고구려가 다 탐을 내었지만 결국 힘이 가장 센 저 광개토가 뺏아 자셨지!”

광개토대왕이 뺏들었다고요?”

말이라고 해? 우리 신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진 뒤 제일 먼저 달천 철장의 철을 빼앗겼지.”

설마? 훌륭하신 우리 대왕님이 그렇게 했겠어요?”

자고로 훌륭함이란 힘에서 나오지. 호랑이나 사자는 훌륭하다고 하겠지만 누가 지렁이나 벌레보고 훌륭하다고 하겠는가. 전쟁에서 이긴 놈이 훌륭하지 진 놈이 훌륭하진 않아. 넌 아직 어려서 똥인지 된장인지 뭘 몰라. 광개토도 일개 탐욕스런 정복군주에 불과해. 고구려가 네 나라 가야국의 철도 뺏아가고 있는데, .”

우리 가야철도?”

물론이지. 한반도 최고의 양질인 철인 가야 야로 철을 고구려가 다 퍼가고 있지.”

실성은 이따금씩 꺽감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해댔다.

그뿐 아니었다. 광개토대왕의 칼에 가야의 하령왕이 죽은 것이며 그 왕비가 바로 소후 여옥인데 여옥은 자진하지 않고 무슨 염치로 광개토왕의 애첩이 되어 사는지 모르겠다며 코를 팽 풀며 퉁을 놓기도 했다.

실성의 모든 말들이 대체로 삐딱선을 타고 있어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는데 한편으로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묘한 공감대를 만들었다. 실성의 표정은 대체로 어두웠는데 자신은 현재 고구려 포로의 신분이지만 언젠가는 이 갑갑한 처지에서 벗어나 신라왕으로 갈 것이라고 장담할 때는 그나마 희망의 눈빛이 반짝였다.

꺽감도 실성을 형님으로 모시면서 서서히 고구려에 대한 비판의 물이 들기 시작했다. 모욕이 조상과 나라에 미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반드시 가야에 돌아가 고구려의 속국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꺽감이 실성과 함께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고국 가야에 대한 충정심이 생겼다.

실성은 성적으로도 성숙해 꺽감에게 이런저런 부끄러운 얘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헌데 저기 백제공주 다해 말이야.”

다해가 왜요?”

너 다해 좋아하지? 다해 생각하며 거시기 주물럭거리기도 하고 말이야.”

형님, 무슨 망칙한 말씀이우?”

거련과 같이 놀면서도 다해 마음은 엉뚱한데 있어. 보라구, 너를 한 번씩 해끔해끔 쳐다보잖아.”

아니나 다를까 실성의 말대로 다해가 고개를 숙인 채로 꺽감을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그게 왜요?”

이 바보 멍텅구리야. 그건 거련과 놀고 있지만 마음은 너한테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야. 너도 다해를 죽도록 좋아하지. 헌데 거련은 그걸 더럽게 싫어해. 탐을 내고 시샘하는 것은 사람이 태어나 밥을 먹으면서 생겨난 습성이야. 너는 거련보다 한걸음 먼저 걷기를 바라지. 네 스스로의 힘으로 말이야. 그러나 절대 거련 앞에서 잘난 척 하지 말고 아는 티도 내지 말고 그저 쥐 죽은 듯 국으로 처박혀 있어야 너나 나나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 알겠어, 이 바보야?”

꺽감은 거련 앞에서 잘난 척 하지 말라는 실성의 말이나 여옥, 다해의 충고는 모두 자기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왠지 거련을 이기고 싶다는 치기는 더욱 강해졌다.

며칠 뒤 영명사에 태왕과 거련 태자가 납시어 모든 질자들이 강학소 대청마루에 모였다. 꺽감은 태왕의 제왕학 수업을 듣기 위해 백제공주 다해와 같이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거련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 태왕에게 물었다.

아바마마, 질문이 하나 있어요.”

뭣이냐?”

저기 꺽감도 우리 고구려의 볼모가 맞나요?”

당연히 볼모가 맞지.”

꺽감도 저의 종이고 하인이고 내가 꺽감의 주인이 맞습니까?”

태왕은 거련의 속마음을 알겠다는 듯 분명하게 말했다.

개가 주인과 밥상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처럼 가야인은 고구려인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자 거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거련은 꺽감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태왕을 통해 확인받고 싶고, 다해를 비롯한 모든 질자들에게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다.

태왕은 질자들을 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 질자들은 잘 들어라. 너희들이 같이 공부는 하지만 꺽감을 비롯해 너희들 모두는 우리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져서 잡혀온 인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태자를 깔보거나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된다. 태자는 너희들의 목숨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존재이다. 거련은 장차 짐의 뒤를 이을 왕이고 너희들은 태자의 볼모이기도 하다. 알겠는가?”

.”

꺽감도 태왕과 태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꺽감은 이 모든 말이 자신만을 향한 태왕의 근엄한 꾸지람이라고 생각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슬펐다. 가야인은 고구려인이 될 수 없고, 고구려인은 가야인이 될 수 없다. 내가 인자한 어버이로 생각했던 광개토대왕도 결국 실성의 말대로 일개 탐욕스런 정복군주에 불과했다. 거련도 그 뒤를 이어 같은 길을 걸어갈 것이다.

개와 다름없는 가야의 질자가 태자와 같은 밥상에 밥을 먹으려 들었던 것이 애당초 잘못이었다. 실성의 말대로 태자 앞에서 잘난 척 하지 말고 그저 쥐 죽은 듯 국으로 처박혀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천만다행인 것이다.

태왕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따라 꺽감은 태왕의 말이 건성으로 들렸다. 그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따위보다 대가야의 시조 정견모주와 이비가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후누 장군은 잘 계실까? 아버지는 나를 대가야의 시조모 정견모주의 사당에 데려가 참배를 시켰지. 정견모주와 천신 이비가지가 혼인해 대가야의 태조인 뇌질주일왕과 금관가야의 시조인 뇌질청예왕을 낳으셨다. 돌아가신 하령대왕은 대가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위대한 증흥군주였으나 그렇다, 바로 광개토대왕의 칼에 참수를 당하신 것이다.’

 

패강변에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영명사에 때 이른 봄꽃이 피고 통랑한 독경소리가 들렸다. 맑은 강은 들을 둘러 흘러가고 어디선가 낮닭의 울음이 귀에 살포시 들리더니 이어 수탉 한 마리 옴팡지게 울어대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광개토대왕은 영명사에서 아들과 질자들에게 한가롭게 고구려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나 마음은 온통 조선반도의 남부와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 이번 전쟁으로 백제의 근고초왕이 만든 백제, 가야, 왜국의 국제 연맹을 와해시키고 배달의 땅에서 처음으로 사국통일을 이루는 거야.’

광개토왕이 평양을 경영하면서 끊임없이 백제와 싸우며 남진정책을 추구한 것도 고구려에 의한 백제 신라 가야 정복의 사국통일에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다.

영명사에 머물고 있는 태왕에게 고구려에서 대가야로 보낸 세작이 찾아왔다.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저기 질자들이 앉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아이들인데 괜찮아. 나지막하게 말해보게.”

세작은 잠시 주저하더니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박지 집사의 보고에 의하면, 저기 가야아이 꺽감은 죽은 하령왕과 소후 여옥의 아들이라 하옵니다.”

무엇이? 꺽감이 하령과 여옥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고상지가 분명히 소후의 아들을 죽였다 했거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세작이 광개토태왕에게 막 보고를 하고 있는 그때 장화황후가 수경을 대동하고 포승으로 고상지 도독의 손목을 묶고 여옥의 머리채를 잡아끌고서 영명사의 뜰에 나타났다.

태왕이 놀라며 말했다.

아니, 국내성에서 재상 을력소와 함께 나라를 지켜야 할 당신이 어떻게 평양에 나타난 거요?”

장화황후가 새된 소리로 태왕에게 말했다.

나라는 외부로부터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망한다고 말한 분은 폐하입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의 눈과 귀를 속이고 내부에 잠입한 가야의 역적들을 처단하기 위해 밤도와 달려왔습니다.”

그 역적들이 누구란 말이오?”

바로 아이를 바꿔치기 하게 한 고상지 도독과 여옥이고, 저기 있는 여옥의 아들 꺽감이지요.”

장화황후는 대가야의 상한기인 박지 집사가 보고서를 보내 이런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황후 앞으로 보낸 박지의 보고서를 읽은 광개토는 방금 들은 세작의 보고와 그 내용이 일치하는데다 이런 상황들이 쉽사리 믿기지 않아 잠시 하늘을 쳐다보곤 고상지와 여옥, 수경을 보며 추달했다.

고상지 도독, 여옥 소후, 수경 유모, 황후의 이 모든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고상지는 고개를 흔들며 강력하게 부인을 하고 있고, 여옥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경은 시인을 하는 듯 태왕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꺽감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운명이 바뀌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태왕은 소후 여옥에게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경은 아이를 바꾼 것을 시인했다. 그런데 너는 왜 말이 없는가!”

“......”

꺽감이 정녕 가야의 하령왕과 너의 아들이 맞는가!”

여옥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황후, 아니라지 않소!”

장화황후는 이 광경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질렀다.

네 이년, 어느 안전에서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느냐. 네 년이 대가야의 고상지와 수시로 상간하고 내통하면서 마지막엔 꺽감을 왕으로 세워 고구려에 반역하려는 걸 모르는 줄 알았더냐! 여봐랏! 이 반역자 고상지와 여옥 소후, 그리고 소후의 아들 꺽감을 당장 처단하라!”

광개토대왕은 장화황후를 보며 말했다.

황후, 진정하시오. 판결은 내가 내리는 것이오.”

이어 마음을 진정한 태왕이 장수와 신하들 앞에서 준엄하게 말했다.

태왕은 대노했다. 장화황후도 태왕과 대례를 치른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이처럼 진노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장화황후는 앞으로 전개될 이 상황이 두려우면서도 마음은 맑은 하늘처럼 시원했다. 그동안 태왕이 사랑한 애첩 소후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밤을 불면으로 지새웠던가. 더구나 소후가 데려온 가야아이 꺽감마저 태왕이 금지옥엽처럼 사랑해 한 때 꺽감이 소후와 태왕 사이에 난 아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꺽감이 학문과 무예, 건강에서 자신의 아이 거련보다 뛰어나 보일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장화황후는 미천한 땅 가야에서 올라온 두 사람 때문에 늘 짜증과 신경질이 떠나지 않았고 좌불안석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박지의 놀라운 보고를 받고 눈엣가시인 애첩 소후와 턱에 달린 혹 같은 꺽감을 한꺼번에 제거할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장화황후는 태왕에게 말했다.

박지 집사의 말에 따르면 여옥은 고상지와 사통한 뒤 고상지의 허락 하에 수경의 아이와 바꿔치기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폐하를 속인 가야의 역적들, 소후와 꺽감, 고상지를 처단하고, 이번 일에 공을 세운 박지 집사를 대가야의 왕으로 삼으소서.”

여옥이 고상지와 사통해 대왕의 명을 거스르는 반역죄를 범했다면 여옥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상지는 자신이 부패한 죄는 인정했으나 아이를 바꿔치기한 것은 전혀 몰랐으며 여옥과 사통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시종여일하게 주장했다.

태왕마마, 저는 저의 아둔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죽음을 달게 받겠사오나 오로지 태양 같으신 폐하의 충직한 부하로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가야의 집사 박지는 아주 노회하고 요사스런 자로 그 자의 궤계에 놀아난 제가 부끄럽습니다. 폐하께 받은 은덕을 걸고 한 푼의 거짓 없이 맹세컨대 저는 수많은 여인과 몸을 섞었으나 여옥 소후와는 단 한 번도 몸을 섞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 바꿔치기에 관해서는 여옥 소후가 아이를 낳자마자 출산 현장에서 갓난 아이를 처단한 저로서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소문이 종통을 잃은 가야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수경을 비롯한 가야백성 사이에 만들어진 망상이나 유언비어, 거짓 환상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미련하게도 가야땅에서 정치를 잘못해 금관가야로부터 아홉 가야를 잃고 가야땅을 지키지 못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참수형을 받을 죄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불충한 제 목을 쳐 후세의 귀감으로 삼으소서.”

태왕은 고상지의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고상무 고상지 형제는 나와 함께 말에서 자라 나와 함께 말에서 전쟁을 치르며 지금까지 왔다. 형인 고상무는 하령왕에게 죽었으나 아우인 고상지는 내 손에 죽어야 할 운명이구나. 비록 고상무의 말이 스스로에겐 진실일지는 모르나 정확한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거짓과 사실이 뒤섞여 있는 것도 분별치 못하는 것이다. 노회한 박지나 영리한 수경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일단은 어느 정도 믿어주고 불같이 노한 장화황후의 질투의 불부터 꺼야 내정이 평화로울 것이다. 안뜰이 고요해야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전쟁을 치를 수 있다.’

태왕은 여옥에게 미련이 남아 다시 물었다.

그래, 네 아이를 살리려고 고상지와 사통까지 했단 말이냐? 넌 도대체 어떻게 된 여자란 말이냐?”

사통의 말이 나오자 여옥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폐하, 고상지와 사통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박지 집사의 음해이옵니다. 고상지는 어리석고 아둔하지만 폐하께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고상지의 삼엄한 감시망 하에 어떻게 아이를 바꿔치기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장화황후가 옆에서 소리를 질렀다.

네 년이 앙큼하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여기 서 있는 수경이 직접 아이를 바꿔치기 했다고 하는데 너는 무슨 거짓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하는가! 폐하, 당장 이 자리에서 꺽감을 베어보소서! 이 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태왕이 흥분한 황후를 제지한 뒤 수경에게 물었다.

여옥소후가 고상지와 사통해 아이를 바꿔치기한 것이 과연 맞는가? 내가 보기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자가 바로 네일 것 같구나.”

맞사옵니다. 두 사람이 사통하여 종통을 잇기 위해 제 아들을 바꿔치기해 죽였습니다. 이 사실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저도 알고 무엇보다도 여소후도 알고 있습니다.”

수경의 두 눈에는 닭의 똥 같은 눈물이 글썽하였다

,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금수로다. 이런 과정에서 희생을 치룬 네 부부의 희생정신이 정말로 갸륵하다. 내가 감히 판결을 내리노니 나의 판결은 다음과 같다!

짐의 명을 거역한 고상지와 여옥은 당석에서 목을 베고, 가야 아이는 아무런 관작 없이 가야로 추방한다. 다만 기른 어머니인 수경이 계속 가야아이 꺽감의 후견인으로 기르도록 한다. 지금 당장 시행하라!”

광개토왕의 판결에 장화왕후와 수경은 만족했다. 다만 황후는 꺽감마저 처형을 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으나 그것은 과욕이었다.

영명사의 경내에는 어두운 구름이 무겁게 내려와 있었다. 경내 마당에는 태왕의 명령을 거역한 대역죄인 고상지와 여옥이 포박당한 채 참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에 세운 보좌에는 태왕이 장화황후가 함께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수경과 꺽감이 처형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망나니가 칼춤을 추며 먼저 고상지의 목을 베었다. 고상지의 목의 두께가 두꺼워서 단칼에 베지 못하고 두 번에 걸쳐 베었다. 마치 돼지의 목이 떨어지듯 끅하는 멱따는 소리와 함께 고상지의 목은 영명사 경내에 떨어져 곧바로 지옥의 무저갱으로 떨어졌다. 수경의 마음 깊은 곳에서 꽉 막혀 있던 무거운 쇳덩어리가 쑥 내려가면서 눈에서 시원한 복수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 나의 아들을 죽였던 원수! 이제야 가는구나.’

망나니는 이어 소후 여옥의 목을 베려하고 있었다.

두둥실 피어난 연꽃과 같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소후 여옥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했다.

태왕이 흥분해서 참수령을 내렸지만 망나니의 칼춤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예전처럼 살리고 싶었다.

소후, 나는 너의 남편 하령과 그 친척들을 죽였지만 너만은 아껴 목숨을 살려주었다. 헌데 나를 배신하고 고상지와 사통해 하령의 씨앗을 보존하고 반란을 도모해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는가?”

“......”

여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녕 할 말이 없는가?”

그녀는 수경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수경아, 정말 고마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망나니의 칼이 연꽃 밑으로 휘익 지나갔다.

그녀는 절 바닥에 떨어진 수급이 되어 생각했다.

폐하, 고상지와 사통한 그런 일은 천만 없었습니다. 고상지는 우직할 정도로 철저하게 폐하의 명령을 이행하려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마치 까치가 둥우리에 알만 낳으면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징그러운 구렁이 같았습니다. 저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죽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제 동무 수경이 자기의 아이를 대신 내놓고 제 아이 꺽감을 살린 것입니다.

폐하, 하오니 차라리 저를 죽여서라도 수경이와 꺽감만은 살려 주십시오. 대가야의 종통 꺽감과 가여운 제 동무 수경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래야만 제가 지하에 가서도 편히 눈을 감겠습니다.

폐하, 수경은 저보다도 이쁘고 저보다도 마음이 착한 여자입니다. 저 대신 수경이를 사랑해주세요. 수경이를 부탁합니다.’

 

여옥의 목이 망나니의 칼에 떨어졌을 때 수경은 나오려는 헛웃음을 어금니로 깨물며 꺽감의 손을 꼬옥 잡고 놓지 않았다.

 

그날 밤 태왕은 뜻밖에 수경의 방을 찾았다.

수경은 깜짝 놀라며 태왕에게 말했다.

폐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십니까?”

궁금한 점이 있어 찾아왔소.”

태왕은 자리에 앉아 그녀는 고구려 벽화 속의 그림처럼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어깨까지 드리운 향기로운 생머리, 반듯한 하얀 이마와 여운이 감도는 입매, 부드러운 어깨선과 무릎 위에 얌전하게 포개진 손. 그녀의 알듯 말듯한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태왕은 조용하게 들여다보며 말했다.

고상지와 여소후는 꺽감이 하령왕과 여소후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소. 오히려 박지와 장화황후와 당신의 말대로 대가야의 종통이라고 믿지.”

과연 그러합니다.”

난 그게 궁금해서 온 게 아니라 이번 옥사를 누가 일으켰나 하는 것이 궁금한 게요.”

그건 장화황후 앞으로 보고서를 쓴 박지 집사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올 이유가 없지.”

태왕은 윗옷을 벗으면서 웃었다.

?”

나는 일순(열흘) 간격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세작을 보내지. 세작들은 각국으로 흩어져 온갖 것들을 물어오지. 구중궁궐 궁중의 암투에서부터 왁자지껄한 장터의 민심까지. 그런데 흥미로운 정보가 대가야 최고의 미인이라는 후누 장군의 집 내실에서 자꾸 흘러나오는 거야. 그래서 짐이 흥미를 좀 갖게 됐지.”

그러시면, 후누 장군의 집 내실인 저에 대해 어떤 흥미로운 정보를 얻었나요?”

글세, 짐과 같은 과의 사람이라는 정도지.”

폐하께서 절 그렇게 과대평가하시다니 고맙군요.”

일단 여소후와 같은 착한 여자는 아니지. 어쨌든 꺽감은 대가야의 종통이고 당신은 꺽감의 양어미고.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 아니오.”

“......”

이제 원수도 갚았으니 아이를 바꿔치기한 것 때문에 노여워하거나 복잡한 마음을 가지지는 마시오.”

태왕이 손을 뻗치자 그녀는 드넓은 만주초원을 자유로이 뛰노는 한 마리 아름다운 암사슴이 되었다. 태왕은 암사슴의 뒤를 쫓는 거대한 호랑이였다. 암사슴이 멀리 눈 덮인 백두산을 보며 샘물을 마시고 있을 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진 호랑이가 뒤에서 암사슴의 목덜미를 노리며 다가가고 있었다.

태왕은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꺽감이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오.”

미안합니다.”

미안하긴. 꺽감은 하령왕의 씨앗이자 두 여인간의 우정과 증오의 열매요. 양어미로서 잘 키우시오.”

오늘밤 정말 폐하의 아이를 가지고 싶습니다.”

그건 쉽지 않을 거요.”

태왕은 두 손으로 목을 조르며 뒤에서 교접했다. 그러자 암사슴의 엉덩이가 엄청난 탄력으로 반발했다. 암팡지게 튀어 오르는 엉덩이의 매끈매끈한 촉감이 투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태왕은 조심스레 다룬 여옥과는 달리 수경을 창녀처럼 취급했다. 태왕은 여옥에게는 고귀한 안위를 걱정했지만 수경에게는 불타는 증오가 술기운처럼 치밀어 올랐다. 교접이 증오감에 도취된 더러운 쾌락의 축제였다. 거대한 뿔을 흔들며 쾌락을 높이려 진격하고 또 진격해도 도수가 낮은 술을 마시고 빨아도 술기운이 더 이상 오르지 않은 것처럼 쾌락은 더 이상 올라가지 않은 채 점점 아래로 추락했다.

수경이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이번 전쟁에서 가야는 어떻게 되나요?”

금관가야는 몰락하고 대가야가 일어설 거요. 장차 수경과 꺽감의 역할이 커질 거요.”

태왕은 그녀의 입술에 접문하고 다시 진격했다. 식은 몸에서 정염이 다시 솟아올라 붉은 몸이 되었다. 고요 속에 나눈 대화가 오히려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다.

태왕이 말했다.

가야의 가마는 사국의 가마 중 가장 뜨겁다고 들었소.”

가야의 가마는 아홉 개의 바람 골이 있는데다 골풀무가 세서 그렇죠.”

골편수를 아버지로 둔 딸답게 말했다.

고구려에서 담금질한 강쇠는 웬만한 가마에서는 녹지 않소.”

과연 그럴까요. 그럼, 골풀무를 밟아 보겠습니다.”

수경의 여근에서 뜨거운 담금질이 시작되었다. 골풀무가 더욱 강하게 바람을 불어넣었고 그녀의 여근곡은 뜨겁게 달아올라 쾌락의 불덩이를 녹이고 있었다. 작은 불덩이는 거대한 불덩이로 부풀어 올라 온몸의 말초를 일깨우며 굴러다녔다. 여근곡에서 튀어나온 무수한 작은 쇠망치들이 태왕의 살과 뼈를 난타하며 극한의 담금질을 해댔다. 강철은 밑으로부터 녹았다. 밑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쾌락의 불덩이를 타고 화산처럼 분출했다.

으윽, 태왕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파정했다.

역시 가야의 가마가 뜨겁긴 뜨겁소, 수경.”

고구려의 강쇠도 정말 강하군요, 폐하.”

꺽감과 함께 잘 내려가시오.”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폐하?”

선수끼리 뭘 묻고 그러오?”

접문 뒤에 두 사람이 나누는 말에는 공포의 나른함이 실려 있었다.

살과 뼈가 녹진하게 녹아내린 두 사람은 죽음보다 깊은 수면에 빠졌다.

수경은 꺽감과 함께 고구려 국내성을 나와 대가야 후누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수경은 달팽이가 자기의 집을 지고 다니듯 자기도 꺽감이라는 자신의 존재의 껍질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전율의 행복을 느꼈다. 그녀의 삶에 있어서 꺽감은 일부이면서도 없으면 죽고 마는 전부이자,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