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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시가 있는 가요 산책 (40) 마지막회

작성일 : 2021.02.27 10:03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시가 있는 가요 산책 (40) 

 

방실이, 청춘열차

 

이승주 (시인)

 

 

 

끝없이 불타오르는 가슴엔 사랑이 차고

싱그런 이야기로 펼치는 내일이여.

장밋빛 젊은 영혼이 만나는 간이역마다

고독한 너와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어디쯤 가야만 하나 끝없이 이어진 이 길

아직은 우리 서로 서툴고 낯설지만

그러나 누가 멈출까, 달리는 청춘의 열차.

바람찬 언덕 넘어 꽃피는 에덴으로

아 차표 없이 가는 인생이여.

머물 곳이 따로 없다 해도 사랑하는 그대 함께 가는

너와 나의 청춘열차여.

 

고고성(呱呱聲)을 울리는 그 순간 우리의 인생열차도 출발의 기적을 울린다. 태어날 때 이미 우리는 인생열차의 차표를 손에 쥐고 태어난다. 칸칸이 푸른 깃발을 단 청춘열차장밋빛 젊은 영혼이 만나는 간이역을 지나 꽃피는 에덴에 닿기 위해 바람찬 언덕 넘어급히 달려간다. 청춘의 열차에 몸을 실은 너와 나”. 아직은 서툴고 낯설고 또 고독하지만 끝없이 불타오르는 가슴에 차는 사랑 있어 오늘도 내일의 꿈을 꾼다.

 

피어나는 꽃은 아무래도 간이역.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道程)에 꽃이 피어 있었던가.

 

잠깐 멈추어서

그때 펼 것을, 설계(設計)

찬란한 그 햇빛을…….

 

오랜 동안을 걸어온 뒤에

돌아다보면

비뚤어진 포도(鋪道)

아득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꽃은 지고

지금 그 꽃에 미련은 오래 머물지만

져버린 꽃은 다시 피지 않는 걸.

여숙(旅宿)에서

서로 즐긴 사랑의 수표처럼

기억의 언덕 위에 잠깐 섰다가

흘러가 버린 바람이었는 걸…….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에 작은

간이역 하나 있었던가.

간이역 하나가

꽃과 같이 있었던가.

정공채, 간이역

 

인생이란, 순환열차가 아니라 저 무한한 우주로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999은하(銀河)열차처럼 시간이라는 이름의 협궤열차를 타고 끝없이 흘러가는 것. 끝없이 흘러가는 우리네 인생에서 으로 피어나던 한때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이란, 지나치고 나면 비로소 깨닫는 간이역같은 것이던가. “꽃은 지고”, 이제 와서 그때 잠깐 멈추어서 꿈과 이상을 마음껏 설계하고 펼쳐 볼 것이라고 회한해본들 흘러가 버린 바람처럼 한번 지나쳐 버린 간이역으로 다시 선로를 되돌릴 수 없는 것 또한 인생열차.

 

더 외로워지기 위해 나는 떠난다.

저 아득한 절망의 가지 끝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며 빛나던 이름아.

나를 버리고 세월도 떠나라.

어둠 속에서 잠들었다가도

불빛만 가 닿으면 깨어나는

두 줄기 눈물의 철로.

쓸쓸함은 다 내게로 빗발쳐 오라.

이 밤을 넘으면.

이승주, 태백선

 

나의 청춘열차는 더 외로워지기 위해떠나는 열차였다. 내 청춘열차의 선로는 쓸쓸함이 다 내게로 빗발쳐 오던, “어둠 속에서 잠들었다가도 / 불빛만 가 닿으면 깨어나는 / 두 줄기 눈물의 철로였다. 그런 나를 위해 나는 내 첫 시집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에서 이 시집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나의 청춘에게 바친다.”고 적었다. 그때 내 푸른 봄(청춘)’은 신문지 한 장도 되지 못할 외로움 뒤집어쓰고 시를 쓰며 견디던 길고 긴 겨울이었다. 그래, 내 첫 시집의 서문에 또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내 청춘은 힘들었지만 시가 있어 간신히 버텨 왔다. 내 청춘은 시와 결혼하였으므로 여기 시편들은 내 청춘의 자식들이다. 비로소 첫 시집을 청춘의 제단에 바칠 수 있어 좋다. // 내 시의 자궁인 불면, 내 시의 자양분인 슬픔, 내 시의 오랜 벗인 외로움과도 이제 작별할 때. 반꽃반잎의, 억수 같이 남은 좋고 좋은 날 농익은 인생의 멋에 취해 길이 노래 부르리라.”

, 내 청춘의 열차는 바람찬 언덕을 넘어 넘어 왔으나 꽃피는 에덴은 아득하고 아득하기만 할 뿐이어서, 첫 시집을 청춘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그때 나는 눈물겨웠던 나의 청춘과 작별을 고했다. 그리하여 나 이제 내 여읜 푸른 봄날을 애틋함으로 추억하되 다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그 얼음장을 견디던 그 청춘의 시린 겨울밤으로.

 

 

 

 

연재를 마치며

 

어둠이 가득 차올랐다. 밤의 천지가 고요히 깊다. 깊은 고요의 어둠은 내가 잠시 건너온 다른 세상. 노래는 어떤 면에서 이런 어둠을 닮았다. 때로 몽환적이며 때로 애틋한 어떤 세계로 잠시 나를 데려간다. 사랑, 그리움, 외로움 같은 내면의 정서만 명징하게 샘솟고 그 밖의 공명이나 부귀에 대한 욕망, 괴로움 따위는 그 순간 사라진다.

 

깜깜한 어둠은 거울. 잘 닦은 거울. 깜깜한 어둠은 캔버스. 깨끗한 빈 캔버스. 어떤 면에서 노래는 또 깜깜한 어둠의 거울, 깜깜한 어둠의 캔버스를 닮았다. 어둠의 거울, 어둠의 캔버스 위에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가 흐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 하나가 또렷이 비쳐온다.

 

빈 캔버스 위에 아주 작은 발자국 하나가 찍힌다

아주 작은 발자국 위에 작은 발자국이 찍힌다

작은 발자국 위에 조금 작은 발자국이 찍힌다

 

조금 작은 발자국 위에 조금 큰 발자국이 찍힌다

조금 큰 발자국 위에 조금 더 큰 발자국이 찍힌다

조금 더 큰 발자국 위에 다 큰 발자국이 찍힌다

다 큰 발자국 위에

더 이상 크지 않는 발자국이 찍힌다

 

캔버스 위에 발자국들이 겹친다

발자국 위에 발자국들이 쌓인다

차가운 발자국 위에 뜨거운 발자국

멍든 발자국 위에 못 박인 발자국

망설이는 발자국 위에 숨어드는 발자국

끝내 말 못하는 발자국 위에 지고 또 지는 발자국

늘 그림자인 발자국 위에 쩔뚝이는 발자국

흐린 발자국 위에 장마와 장마를 건너는 발자국

없는 발자국 위에 없어도 좋을 발자국

길 잃은 발자국 위에 정처 없는 발자국

가 닿지 못하는 발자국 위에 멀어지는 발자국

 

깜깜한 밤에 일어나 캔버스를 본다

멀리서 아주 작은 발자국 하나가 걸어와서 다 큰 발자국을 남기고 간다

깜깜한 밤에 혼자 일어나

여기저기 바람 속으로 흩어지는 발자국들을 본다

뒤척임만 남은 발자국을 본다

이승주, 깜깜한 어둠은 캔버스

 

노래는 길고 인생은 짧다.’

어둠의 거울, 어둠의 캔버스 위에 흐르는 세대를 뛰어넘어 애창되는 우리 가요를 들으며, 어둠의 거울, 어둠의 캔버스 위에 또렷이 떠오르는 발자국들을 애틋하게 사랑할 때, 더러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린다. 세대를 뛰어넘어 애창되는 우리 가요가 내게 그러하듯이, 내 시도 오래 살아남고 사랑 받아 내 사후에라도 누군가에게 시로 위로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이승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