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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2.20 12:20
어니언스, 편지
이승주 (시인)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멍 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 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 노래 보낸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멍 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 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 노래 보낸다
눈물을 씻고 다시 읽는다.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내려간 너의 진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너의 편지는 가슴을 방망이질하는 편지―나는 이제 세월에 하마 바래여서 남 몰래 그런 연서를 쓰던 그 밤들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기억해 낼 수 없다―가 물론 아니다.
나를 울리는 편지. 그러나 내가 우는 건 너의 떠남 때문이라기보다도 이제사 비로소 알게 된 너의 진실, 이때까지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였다가 마지막으로 마음을 돌리면서 고백하는, 나를 향한 너의 연정(戀情) 때문.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을 알게 된들 어쩌랴, 너는 이미 나를 떠났는데. 아, 내 그때 그녀도 내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다니, 네 떠난 뒤에서야 “멍 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라니 “그녀”와 “나”는 못난이처럼 오래도록 서로 가슴만 태웠던 것이다. 그러니 어니언스의 「편지」는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비애의 노래가 아닌, ‘맺어질 수 있었으나 맺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때늦은 회한과 서러움으로 가슴이 멍들고 뻥 뚫려버린 사내가 떠나버린 여인에게 보내는 부질없는 사랑의 노래이다.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황동규,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의 시 「조그만 사랑 노래」는, 어니언스의 「편지」처럼 거절의 상처가 지레 두려워 용기 있게 먼저 연정을 고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밤새 짝사랑으로 불면의 심지를 돋우다가 마침내 떠나버린 사랑 앞에 서럽게 눈물짓는 소심한 연가가 아니다. 황동규의 시에서 “어제를 동여맨 편지”는 결별의 선언을 담은 편지. 나는 다시 눈물을 씻고 다시 편지를 읽는다. 어제의 소인이 찍힌 그 편지는 하숙집 대문 앞 능소화를 설레임으로 붉게 물들이던 그 편지가 아니다. 아마 “그대”도 내가 아는 그 사람처럼 틀림없이 이 편지를 몇날 며칠을 부치지 못한 채 가슴을 앓으며 품속에 가시처럼 지니고 다녔으리라.
내 그대에게 이르는 길을 끊어놓고, 내 그대와 함께 하던 시간의 길 위에서 꽃피던 사랑의 기쁨, 행복들 거둬가고, 그리하여 그 길 위에서 즐거웠던 추억의 순간들이 모두 울음을 삼키며 나를 외면하고 돌아앉아도, 그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네 이름 부르며 “사랑한다 사랑한다”. 어둠이 내리는 얼어붙는 저녁 하늘에 절규는 메아리도 없이 흩어지고 스산한 마음에 가로 세로 그어지는 깨어진 사랑의 금들. 그 금들 위로, “땅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 몇 송이 눈.” 사랑의 결별 앞에 더욱 가슴을 금가게 하는 건 함께 행복했던 추억의 시간들 때문이라, 그때, 이 지상 그 어디 그 어느 가슴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던 내 젊은 날들의 금간 가슴 위로도 흩날리며 내리던 몇 송이 눈. 사랑이 슬퍼서, 삶이 외롭고 슬퍼서 그래서 나는 시인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