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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02.13 09:51
둘다섯, 긴 머리 소녀
이승주 (시인)
남자도 좀 아는
40대 초반 여자와
여자도 좀 아는
40대 중반 남자가
어쩌다 우연히 만나면서부터
눈빛으로 서로 마음이 잘 통해
의기투합 끝에
주점에 들러서는 몇 잔 술도 주거니 받거니
나눠 마신 다음,
달 밝은 밤
좁다란 골목길을 비틀비틀 어깨동무한 채 걸으며
나 오늘밤 연애할까, 말까
두 남녀 제각각 이런 생각하는 사이―
달은 구름 속으로
달은 다시 구름 밖으로
―이수익, 「달과 구름」
구름도 슬쩍슬쩍 밝은 달의 눈을 가려주는 밤, 남자도 좀 아는 40대 초반 여자와 여자도 좀 아는 40대 중반 남자가 서로 마음이 잘 통해 주점에 들러 몇 잔 술도 주거니 받거니 나눠 마신 다음 좁다란 골목길을 비틀비틀 어깨동무한 채 걸어가고 있다. 구름도 알아서 슬쩍슬쩍 두 남녀 제각각 ‘나 오늘밤 연애할까, 말까’ 슬금슬금 일어서는 욕정을 가려주는 밤, 한길에서 비껴난 좁다란 골목길을 비틀비틀 어깨동무하고 걷는 이들의 발길은 마침내 어디를 찾아 들 것인가.
우리가 대중연애소설에서 읽는 중년의 애정의 풍속도는 「달과 구름」처럼 대개 물큰하고 뒤끝이 질척질척하지만, 「긴 머리 소녀」는 봄밤의 봄비소리처럼 나직하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달처럼 탐스런 하얀 얼굴
우연히 만났다 말없이 가버린
긴 머리 소녀야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조심조심 징검다리 건너던
개울 건너 작은 집에 긴 머리 소녀야
눈 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리라
불타는 욕정이나 끈적한 미련이 없이 맑은 개울물처럼 깨끗하다. 아련한 슬픔과 그리움이 빗소리에 잔잔히 젖지만 애이불상(哀而不傷)이다. 그래서 그것은 뼛속까지 파고들지 않는 대신 계절마다 앓는 가벼운 몸살기처럼 온다.
첫눈이 그냥 혼자 오지 않듯이 빗소리도 그냥 혼자 오는 게 아니다. 그리움과 함께 온다. 그래서 빗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거나 오지 않은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내 첫사랑 J는 개울 건너 작은 집에 살았다. 보름달처럼 복스럽고 탐스러웠다. 긴 머리가 검은 윤기로 빛났다. 어쩌다 한번 뒷자리 앉아 느꼈던 그 긴 머리의 비누냄새가 좋아 일부러 뒷자리에 앉고자 했다. 그 긴 머리에 나는 숙인 얼굴을 가까이 하며 그 향긋한 냄새에 나를 잊고 올올이 그 긴 머리를 무척 만져보고 싶은 생각으로 하루가 금방이었다.
이제 내 첫사랑 J는 개울 건너 작은 집에 살지 않는다. 그때 나는 그 소녀가 사는 집이 어디인지 몰래 따라가 보았다. 복사꽃이 피는 과수원길을 돌고 개울을 건넜다. 복사꽃이 피는 과수원길을 돌고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 거기는 결국 내 마음이었다. 아직도 내 마음에는 그 과수원길에 복사꽃이 피고 맑은 개울이 흐르고 징검다리가 놓여 있고 징검다리 건너 작은 집에 그 소녀가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