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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4)

작성일 : 2021.02.08 11:22

대가야제국의 부활  

/김하기

 

1부 하지태왕과 장수왕(4)

반달이 동산에 떠올랐다. 아픈 달빛이 주산 능선의 왕족 고분군들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후누 장군은 죽은 하령왕의 황금갑옷과 철투구, 환두보검을 방 한 칸에 걸어두었다. 후누는 울적한 기분이면 그 방에서 밤늦게 혼자 고령주를 마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방문이 열리며 아내 수경이 들어왔다.

또 잠을 자지 않고 이 귀신같은 방에서 술을 퍼마시고 있군요.”

술을 한 잔 하지 않으면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겠소.”

장군이 아니라 모주꾼이 되었구랴. 그렇게 매일 술에 젖어 살면 어찌 군을 통솔하겠소!”

이제 모두 고상지 도독 하에 허수아비 군대가 되어버렸는데 통솔은 무슨 통솔이오?”

후누는 달빛에 반짝이는 갑옷 미늘과 장식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난 이 갑옷을 입은 하령왕과 함께 철기군을 이끌고 고구려와 싸워 이긴 그 때가 그립소.”

또 하령왕 타령이오? 당신에겐 하령이 요순우탕 같은 성군인지 몰라도 저에겐 망국의 군주일 뿐이에요. , 당신은 늘 술에 취해, 과거에 취해 살고 있어요. 나라가 망해 고구려의 속국이 된 현실을 인정하세요.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가야왕비를 첩으로 거느리면서 천하를 호령하고 있는데다가 우리 대가야가 망한 틈을 타 금관가야가 다시 일어나 열두 가야의 맹주가 되었어요.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요.”

아내 수경이 딱따구리처럼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해댔다.

당신이 가야의 산천을 다시 푸르게 회복시킬 수 있다구요? 그건 거짓부렁 가짜희망이에요. 광개토대왕은커녕 배뿔뚝이 고상지 도독과 노회한 얌생이 박지 집사에게도 맞서지 못하고 짤짤 매고 있잖아요. 지금 집집마다 골목마다 고구려와 금관가야의 세작(細作,간첩)들이 들끓고 있는 것 뻔히 알잖아요. 이러다간 불평불만만 일삼는 당신은 군신지 자리마저도 제대로 보전하지 못 한다구요.”

후누 장군은 아내의 잔소리에 이골이 났다. 아내의 말대로 장군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시골에 들어가 밭이나 갈고 살려고 마음먹은 게 골백 번도 더 된다. 하지만 하령왕을 이을 꺽감이 그에게 마지막 남은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반드시 꺽감 왕자가 성장해서 대가야로 돌아와 하령왕의 황금갑옷을 입고 철투구를 쓰고, 환두보검을 찬 늠름한 대왕이 되어 권토중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죽으리라는 속다짐을 했다.

여보, 우리가 시련을 겪는 이 날들은 지난 사백 년 가야 종통과 앞으로 있을 장구한 미래에 비하면 탄지(彈指) 같은 짧은 시간이오. 이 시련도 곧 지나갈 것이오.”

탄지는 손가락을 튕기는, 아주 짧은 시간을 말한다.

뚱딴지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고요. 아 참, 박지 집사가 그럽디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자기아들과 같이 놀아줄 또래 동무 하나를 대가야에서 보내달라고 했답디다.”

수경이는 우연히 방금 생각난 듯 말했지만 실은 마음에 벼르고 벼른 끝에 이 말을 했다.

이제는 고구려가 우리에게 인질까지 요구하는 모양이오.”

이것은 백제의 인질이나 신라의 볼모와는 성격이 완전 다르다고 해요. 거련왕자와 함께 놀아줄 동무를 원하는 것이어서 수양아들처럼 키울 거랍니다. 그러니까 박지 집사가 당장 자기 아들 구야를 고구려로 올려 보내겠다고 고상지 도독에게 뇌물까지 두둑하게 바쳤다지 뭡니까.”

거 참 잘됐구료. 상가라도(대가야의 다른말)에서 말썽만 피우던 개구신 구야 아니오? 그곳에서 예의범절이나 잘 배워 왔으면 좋겠소.”

구야는 얼마나 버릇없이 컸는지 그놈의 머리 위의 해는 둥실둥실 떠오르지 않고 건들건들 떠오른다고 하는 판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난 우리 꺽감을 고구려로 보내겠어요! 당장 신라로 가서 당신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꺽감, 꺽깜을 데려 오세요!”

수경이 갑자기 까맣게 잊고 있었던 꺽감을 꺼내며 후누의 등을 떠밀었다.

꺽감이 보기 싫어 죽겠다고 난리를 치며 신라로 쫓아보낼 때는 언제고, 이런 위험한 때에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는 것은 또 무슨 말이오?”

후누는 반대를 했지만 수경의 닦달은 도를 넘었다.

이미 인편으로 친정아버지께 서신을 보냈어요. 이제 우리 아이를 우리가 기르겠다고. 꺽감이라도 있어야 내가 살 것 같아요. 꺽감은 내 아이의 피 값으로 산 애잖아요. 여보, 내가 훌륭하게 잘 키우고 잘 지킬 테니까 염려 말고 데려와요.”

그래도 후누가 안된다고 못을 박자 만약 아이를 데려오지 않으면 관에 가서 꺽감이 하령의 아들이라고 이실직고하고 자진할 거라며 금도를 넘는 말까지 쏟아냈다.

여자는 우물이고 미인은 얼굴값을 한다지만 후누는 수경의 변덕과 비위를 맞추느라 심신이 극도로 피곤했다. 특히 아이를 바꿔치기 한 뒤로 잠자리도 같이 하지 못하고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아이를 바꿔 죽이게 한 것은 자신의 결정이었으니 수경에게 면목이 없고 미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 일로 아비도 죽고 싶은데 아이를 낳은 어미의 심정은 오죽할까.

후누가 수경에게 물었다.

만약 아이를 데려오면 어떡할 거요?”

구야 대신 꺽감을 고구려로 보내 거련의 동무로 만들겠어요.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대가야가 살 길이에요.”

좋소. 어차피 꺽감은 우리 작은 팔로는 닿을 수 없는 높은 운명의 별의 보호를 받고 있을 터, 내가 신라 달천으로 가서 꺽감 왕자를 모셔 오겠소.”

왕손인 꺽감에게는 범인이 기웃거려서는 안 될 고고하고 초월적인 그만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후누는 울뫼(울산) 달천으로 말을 달렸다.

가야를 지나는 도중 민생이 피폐하고 민심이 흉흉한 곳을 많이 보았다. 마을마다 가뭄이 들어 벼와 곡식이 말라죽어가고 있었고 어떤 마을은 역병이 돌아 사람이 뭇으로 죽어나갔다. 굶주린 사람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고, 부랑자가 된 사람들은 비적이 되어 고샅과 고개에서 과객의 봇짐을 털었다.

후누는 달천으로 가는 길에 가야 민정을 살피며 탄식했다.

, 바른 길 착한 길을 가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다. 가야의 하늘 아래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조차 부끄럽고 참혹한 일이다. 가야의 땅에는 죽음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공포가 순환하고 전율이 안개처럼 내리고 있다. 가야의 산하가 이 악몽을 지우고 부끄러운 몸을 털며 일어나는 날은 언제일까.’

가야의 가지에 남은 마지막 희망, 꺽감으로 향하는 후누의 마음과 말발굽 소리가 간절했다.

후누는 낙동강을 건너 신라의 땅 울뫼 달천으로 갔다

옛날 우시산국(울산)이었던 울뫼 달천은 신라 철 생산의 중심지였다. 달천의 금산에서 질 좋은 철이 채광되고 채광터 아래 달천 철소에는 다섯 개의 쇠둑부리 가마에서 철을 녹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후누가 말을 타고 상가라도에서 달천으로 들어가는 길에 철을 캐는 수많은 채광터를 지났고, 채광터에서 캔 철을 운반하는 짐수레와 여러 번 마주쳤다.

가야에는 대가야를 비롯해 다라국(합천), 미리미동국(밀양), 금관국(김해), 아라국(함안) 12가야 전역에서 채광터가 있었다. 예로부터 가야의 전신은 변한으로, 동아시아 철산지의 중심이었다. 낙동강 일대에 생산되는 양질의 철을 삼한과 동예, , 한사군 등에 수출하였다. 또한 철을 무기뿐만 아니라 화폐로 사용하여 군사와 경제를 높은 수준을 끌어 올려 한반도 남부의 강국으로 군림했다. 그런데 위대했던 가야가 어떻게 이렇게 몰락하고 말았단 말인가. 오히려 대가야에서 생산된 덩이쇠들은 마차에 실려 신라 쪽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신라국에도 우시산국(울산), 사량국(양산)에 철산지가 있었다. ‘철굴산’ ‘달내쇠곳이라고 부르는 채광터에는 사철, 토철, 석철 등 다양한 종류의 철들이 채굴되어 울뫼 달천 철소로 운반되고 있었지만 가야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후누는 신라에서 가장 큰 철소가 있는 달천 쇠부리마을로 찾아 들어갔다. 달천 쇠부리 철소의 골편수인 박판수가 쇠둑부리가마에서 철이 흘러나오는 초롱구멍을 보수하고 있을 때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후누가 말에서 내리면서 인사를 했다.

장인어른,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이게 누구야? 대가야의 후누 서방 아닌가?”

둘은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우리 딸 수경이는 잘 있고?”

, 요즘 국경 경비가 하도 삼엄해서 함께 오기가 힘들어서......”

알겠네. 아리수에서 패전한 뒤로 가야와 신라가 사이가 좋지 않지.”

그렇습니다. 패전 이후 신라의 내물 마립간은 완전히 고구려의 개가 되었습니다.”

강약이 부동이네. 오히려 마립간이 현명한 건지도 몰라. 객가인 나는 어느 편도 아니지만 하령왕처럼 고구려에 맞서지 말게. 헌데 전국의 주물장과 단조장에서 농기구 대신 무기류만 만들고 있으니 걱정이야. 아무래도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

그렇습니다. 고구려는 한반도의 끝인 종발성을 노리고 있습니다. 종발성이야말로 백제, 가야, 신라, 왜가 뭉친 주먹 같은 곳입니다.”

광개토태왕이 이곳 종발성(지금의 부산 다대포 일대)을 먹으면 한반도를 통일하고 동아시아의 패자가 된다.

그런데 우리 꺽감이는 어디 있습니까?”

박판수는 사위가 맡긴 꺽감을 자신의 외손자로 알고 정성껏 키웠다. 꺽감은 달천의 들판과 철소를 돌아다니며 장마에 물외 커듯 쑥쑥 자랐다.

저기 쇠둑부리에서 걸어내려 오는군.”

맡길 땐 갓난 아기였던 꺽감은 늠름하고 준수한 아이로 자라 있었다. 후누는 꺽감 왕자에게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 꺽감이 그동안 말썽 피우지 않고 잘 지냈지? 이제 고향으로 가서 아빠와 같이 살자.”

, 아부지.”

꺽감, 본국왕(本國王) 하지(荷知)로 그의 위대한 이름 동아시아에 널리 알려지기까지는 아직도 소털처럼 많은 세월이 남아 있었다

 

울뫼 청량에는 소금을 생산하는 염간의 딸 소라가 있었다. 소라는 외가인 달천에서 태어나 외가 마을에서 자랐다. 얼굴이 박꽃처럼 하얗고 목선과 어깨선이 가냘프고 예뻤다.

꺽감과 소라는 달천 한 마을에서 소꿉친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손에서 자라지 못한 외로운 둘은 다정한 오누이처럼 마음이 끌렸다. 둘은 떡쌀을 쪄내는 구수한 내음이 나는 떡방앗간 담 밑에서 조개껍질과 명아주로 소꿉놀이도 하고 진흙으로 토우인형도 만들며 함께 놀았다. 소금실이 마차를 무작정 따라가다 길을 잃은 적도 있었다.

둘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는 철소였다. 꺽감과 소라는 철석을 가득 실은 수레를 타는 게 신이 났다. 수레는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덜컹거려 재미났고, 쇠부리 철소에 들어가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저탄장과 저철장 사이로 거대한 왕릉처럼 우뚝 솟아있는 쇠둑부리가마를 보는 게 즐거웠다.

꺽감은 그곳에 가면 골편수인 외할아버지 덕에 왕자처럼 취급받았다. 골편수는 철소의 일꾼들을 지휘하는 총감독이었다. 골편수 밑에 불편수, 뒤편수, 둑수리, 숯대장, 쇠대장, 풀무대장 등 백여 명이 일하며 철을 만들어내었다. 야장들이 고사 지내고 남은 떡과 장난감을 줄 때는 둘은 입이 벌어졌고, 풀꾼들이 송풍기를 밟으며 풀무질을 할 때 부르는 노래에 맞춰 둘은 손을 잡고 춤을 추기도 했다.

그날도 둘은 저탄장과 저철장 주변에서 뛰놀다가 쇠둑부리가마로 올라갔다.

쇠둑부리가마는 한번 쇳물을 빼내고 나면 가마를 식히느라 두 시진을 쉬고 다시 쇳물을 끓이곤 했다. 식힌 가마 밑에 불쏘시개를 깔고 그 위에 참숯을 채워 놓고 골편수가 고사를 지낸다. 고사를 지내면 불편수가 불씨를 불쏘시개에 부치고, 풀무꾼이 풀무를 밟아 송풍구로 바람을 불어넣고 쇠둑부리내에 파여진 아홉 개의 골로 바람이 지나가며 가마의 숯불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가마의 불꽃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면 쇠장이들이 쇠를 가마에 집어넣어 숯불에 쇠를 녹인다. 녹은 쇳물은 쇠둑부리 밑바닥인 토둑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려 초롱구멍으로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판장쇠 바탕으로 흘러들어가 판장쇠로 굳게 된다.

어느 날 꺽감과 소라는 쇠둑부리 봉분 위에 놀다가 그만 가마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가마에는 참숯들이 가득해 둘은 다치지는 않았으나 가마구멍이 높아 올라가지 못했다. 파란 하늘이 동그랗게 보였다.

쇠둑부리가마 앞에는 쇠둑부릿일의 우두머리인 골편수 박판수가 고사를 지내느라 아이들이 가마 안으로 들어간 것을 알지 못했다.

박판수의 음복으로 고사가 끝났다.

박판수가 불편수에게 명령했다.

불씨를 붙여라!”

어린 꺽감이지만 이 가마 안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두운 가마에 갇힌 소라가 무서워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라의 울음소리는 쇠둑부리가마 안을 맴돌다 하늘구멍으로 올라갈 뿐 가마 밖에 있는 야장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꺽감이 소라의 우는 눈빛을 마주하자 어린 맘에도 사내의 용기가 살아났다.

꺽감이 소라의 손을 잡고 달래며 말했다.

소라야, 울지마. 나갈 길을 찾아 보자. ”

꺽감도 무섭기는 소라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숯 더미 위에 울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생각이 들었다. 꺽감은 우는 소라를 달래며 나갈 길을 찾았다. 위로는 높아서 엄두도 못내고, 빈틈없이 내화점토를 쌓아올려 만든 가마벽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꺽감은 문득 외할아버지가 보수하던 초롱구멍이 생각났다. 초롱구멍은 가마의 맨 밑바닥에 뚫려 있는데 가마에서 녹은 쇳물이 흘러나오는 제법 큰 구멍이었다.

소라야, 여기 숯을 파헤치자. 밑에 구멍이 있어.”

소라는 울음소리는 그쳤으나 여전히 어깨를 들먹거리며 말했다.

정말? 그러면 나갈 수 있어?”

그래. 그 구멍으로 나가면 돼.”

꺽감과 소라는 작은 고사리손으로 숯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열자나 쌓인 숯더미는 참나무 목탄 장작으로 불땀이 좋게 정교하게 짜 맞춰져 있어서 파헤치기가 쉽지 않았다. 꺽감은 얼굴과 옷이 온통 까맣게 숯칠갑이 되어 숯더미를 파들어갔지만 작은 논두렁아재비가 큰 거름더미를 파헤치는 것처럼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고사가 끝난 골편수 박판수는 뒤불편수에게 지시했다.

, 불씨를 넣어라.”

뒤불편수는 불씨구멍을 열어 미리 준비한 알불 불씨를 가마에 넣어 불쏘시개에 붙였다.

꺽감과 소라는 부지런히 숯길을 내고 있지만 아직 숯더미 밑이 보이지 않았다. 불씨가 불쏘시개에 옮겨 붙어 연기가 숯 사이로 지나서 가마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쇠둑부리 가마 위에는 봉화처럼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박판수는 불편수에게 외쳤다.

불매 올려라!”

불편수가 골편수 박판수의 말을 받아서 불매꾼들에게 지시했다.

불매 올려라!”

앞에 선 여덟 명의 불매꾼들이 서서히 가마에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를 밟기 시작했다. 풀무에서 나온 바람이 송풍구를 통해 가마 안으로 들어가면 아홉 갈래의 골을 지나 골바람을 일으키면서 숯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게 된다.

꺽감과 소라는 매캐한 연기와 뜨거워져 오는 불기운을 피해 숯더미를 파헤치고 들어가자 마침내 희미한 초롱구멍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꺽감은 필사적으로 숯더미를 파헤쳐 초롱구멍으로 가는 길을 낸 뒤 먼저 소라를 초롱구멍 밖으로 보냈다. 쇠도 녹이는 불길이 꺽감을 삼킬 기세로 따라붙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꺽감도 초롱구멍으로 빠져나왔다. 쇠둑부리 가마를 빠져나온 검둥이 둘은 파아란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불렀다.

 

후누는 꺽감을 말에 싣고 가야로 달렸다. 꺽감은 작별인사조차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소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쇠둑부리 가마에 빠져 죽기 직전 함께 빠져 나왔던 소라, 낙동강을 건너면서도, 국경을 넘으면서도, 헤어진 소라의 얼굴이 눈앞에 일렁이며 아슴아슴 비쳐왔다.

언제 다시 소라를 만날 수 있을까?’

어린 꺽감의 가슴에도 이별의 아픔이 낙동강의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꺽감을 대가야의 국읍 어라성에 데리고 온 후누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한밤중에 가야산신 정견모주를 모신 정견모주 사당에 꺽감을 참배하게 했다. 이 사당은 하령왕이 신녀와 천군, 무당들을 숙청할 때 훼손한 것을 여옥왕비가 다시 중건한 것으로 입구에 정견모주의 거대한 목상이 있고, 사당 안에는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

흔들리는 촛불 빛에 왕관을 쓰고 황금옷을 입은 가야의 여왕 복장을 한 정견모주의 초상화는 아름다우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서리가 내린 듯한 새하얀 이마, 함박눈이 내리면 걸릴 듯한 긴 속눈썹, 그 아래 박우물 같이 해맑게 빛나는 눈동자. 사람의 형용이 아니라 귀신의 솜씨였다.

둘은 정중하게 참배를 한 뒤, 후누가 말했다.

꺽감아, 이 정견모주님은 대가야의 위대한 어머니시다. 대가야의 시조왕 뇌질주일왕과 금관가야의 시조왕 뇌질청예(김수로왕)를 낳으신 분이란다.”

두 왕을 낳은 아버지는요?”

천신 이비가지이시다. 천하를 다스리는 하느님이시지. 대가야 왕실은 이런 자랑스런 조상을 둔 하늘의 자손이다.”

정견모주 사당에 참배한 뒤 후누는 꺽감을 지산의 고분군으로 갔다.

제 살을 깎은 반달이 동산에 떠올랐다. 아픈 달빛이 주산 능선의 왕족 고분군들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거대한 고분군들이 산 능선과 경사면에 아담한 작은 산처럼 조성되어 있었다.

후누는 주산 봉우리에 가장 우뚝하게 솟아있는 묘소에서 멈췄다.

, 이 묘소가 하령대왕과 왕족들이 누우신 곳이다. , 대왕마마가 살아 생전에 아들을 볼 수 있었다면.”

둘은 엎드려 절을 했다. 후누는 절을 하고도 좀처럼 일어나질 않았다. 그는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대왕마마, 송구합니다. 대왕마마를 잃은 지 수년이 지났건만, 대가야는 여전히 고구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있습니다. 이제 대왕마마의 유일한 혈통, 꺽감 왕자가 대가야에 왔으니 다시 한 번 찬란한 대가야의 왕업을 일으킬 수 있도록 보우하여 주십시오.’

후누는 간신히 일어나 꺽감의 손을 잡고 무덤 사이를 거닐었다. ‘저 무덤은 시조왕 이비가지, 저것은 조부왕 금림왕의 무덤이라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꺽감을 인사시켰다.

꺽감이 왕들의 묘소 사이로 걸어가다 궁금해 물었다.

아부지, 그런데 아까 정견모주님도 그렇고, 여기 임금님들이 혈통으로는 우리 후누가의 집안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절을 해요?”

으음, 그래 좋은 질문을 했구나.”

후누는 잠시 당황했다. 역시 꺽감은 예리하고 똑똑한 왕손임에 틀림없구나.

우리 집안의 무덤은 다라국(합천)의 옥전에 있단다. 언젠가 거기에 한번 가자꾸나. 하지만 아버지가 지금 대가야의 군신지로 이분들의 신하로 있고, 이분들은 아버지의 어버이니까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마땅하지.”

후누는 꺽감을 기특하게 생각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덧 어둠을 뚫고 희부염한 여명이 밝았다.

후누와 꺽감은 지산 왕실의 묘소를 참배한 뒤, 신새벽 여명의 그림자를 밟고 어라성으로 내려왔다. 무덤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고구려와 화친을 주장하다 뇌옥에 갇혔던 박지는 하령왕이 죽은 뒤 가야의 정무를 총괄하는 집사 직에 올라 국정을 농단했다. 고상지 도독에게는 가야의 미인들과 뇌물로 접대하고 아첨하면서 자신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무시로 살해하거나 뇌옥에 보냈다. 가야 백성들은 멀건 죽조차 입에 대어보지 못하고 산마 한 덩이마저 없어 굶어 죽어나가건만 박지는 백성들을 알겨서 제 식구와 친려파들의 배불리기에만 급급했다.

박지 집사가 군신지 후누를 불러 물었다.

후누 장군, 며칠 전 하령의 무덤가를 어슬렁거렸다지요?”

박지는 한 때 주군으로 모셨던 하령대왕을 거침없이 하령이라고 불렀다.

후누는 가슴이 뜨끔했다. 박지가 세작을 풀어 관료들의 동향을 일일이 염탐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밤중에 세작을 무덤까지 보낼 줄은 몰랐다.

, 제가 아이를 입양해서 대가야의 조상들께 인사를 시키러 갔습니다.”

박지가 염소수염이 난 뾰족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경 부인은 유산을 한 뒤 석녀가 되었는가?”

말투가 깐깐하고 건조한 데다 더러웠다. 박쥐는 깐깐한 성품과 조는 듯한 염소 눈매의 지리함 때문에 함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까닭 모르게 눈싸움이 시작되고 이쪽이 지기 때문이다.

유산 이후로 아이가 서지 않은데다, 제 아내가 하도 닦달해서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그렇다면 꺽감이라는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가?”

오래 전 역병으로 돌아가신 제 형님과 형수님의 아이입니다.”

그러자 박지가 갑자기 후누에게 호통을 쳤다.

나의 이 염소 눈은 절대 속이지 못해. 아이는 자네 집안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네. 아이의 생김새로 보아 자네 가문의 자식이 아니라 죽은 하령의 자식임에 틀림없어! 아이를 입양하자마자 모주와 하령에게 인사시킨 것도 대가야의 종통이기 때문이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는 절에 가서 찾게.”

박지가 염소처럼 졸리는 눈을 멈추지 않고 그 꺼림칙한 의혹들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게다가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수경이가 그놈 꺽감을 고구려로 보내겠다고 몽니를 부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도대체가 후누 장군, 물에 빠진 개를 건져주었더니 고맙다기는커녕 되레 나를 물어뜯는구만. 두고 보게나. 그 아이는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경각에 달려 있네, 에잉

박지는 염소수염 뽑히는 소리를 내며 후누를 물리쳤다.

어라궁성에서 퇴궐한 후누는 마음이 다급했다.

열두 가야의 국읍과 저잣거리에서는 하령왕의 아이는 죽지 않았으며 중신의 아들과 바꿔치기 해 살아 있다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고상지 도독과 박지 집사는 세작을 풀어 이런 소문의 진원지를 캐고 있으며 특히 박지는 후누와 수경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신라 달천에 숨겨둔 꺽감을 대가야의 국읍으로 데려온 것은 그야말로 집사의 말대로 아이를 바람 앞에 촛불처럼 세운 것이요, 아이를 호랑이 아가리 앞에 세운 것과 진배없었다. 집사가 뭔가 눈치를 챈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아이도 자신의 가족도 온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누는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박지 집사를 만나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 놓았다.

아무래도 박 집사가 눈치를 챈 것 같소.”

당신이 멍청하게도 우리 아이를 잡아갑쇼하고 대명천지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물색없이 처신하니까 그런 거죠.”

아무래도 너무 위험해. 아이를 다시 달천으로 보내야 할 것 같소.”

수경이 꺽감을 두 팔로 꼭 껴안으며 후누에게 말했다.

안 돼요, 이 아이는 고구려로 데려 가서 거련왕자와 동무하다 마침내 대가야의 왕으로 돌아와야 해요.”

그렇게 되기만 하면야! 하지만 도대체 당신, 무얼 믿고 그러는 거요?”

정견모주님을 믿지요. 그분이 우릴 도우실 거예요.”

후누는 수경과 살을 맞대고 살았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는 가야그릇 장경호 같은 그 깊숙한 속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계십니까?”

수경은 고상지 도독의 저택 문을 두드렸다.

수경이 이 문을 두드리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그 고민의 끝에는 뜻밖에 어린 시절의 동무였던 왕비 여옥이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자기의 아이를 대신 내어줄 때도 왕비 여옥이 있었다. 그것은 여옥을 위해서라기보다 여옥을 단 한번이라도 이겨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항상 여옥에게 호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상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옥이 하령왕에게 시집갈 때 궁에서 신부에게 납채를 보내는데 폐백이 10수레이고 미(), (), (), (), (), (), ()50수레이며 조곡이 100수레였다. 헌데 수경은 시집 갈 때 그냥 젊은 날의 낭만에 속았다. 떡 벌어진 체격에 창대수염이 거뭇거뭇한 잘생긴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매, 한 눈에 힘깨나 쓰는 장사로 보인 것에 넘어갔다. 온달과 같은 한미한 집안의 후누를 데릴사위로 데려와 궁에다 돈을 쓰고 여옥에 청을 넣어 지금의 군신지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수경은 누구보다 예쁘고 누구보다 잘 나가는 수경부인이었지만 여옥을 생각하면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가도 자신이 초라하고 눈물이 나고 부럽고 화가 나고 죽고 싶어졌다. 그래, 여옥이를 이기는 방법은 여옥의 아이인 꺽감을 내 완전히 아이로 만들면 된다. 그것도 내 아이 꺽감이 왕이 되고 나는 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후누가 아이를 바꿔치기 하자고 제안할 때 그녀는 처음에 죽기살기로 반대했지만 스스로 마지막 인내에 실패했던 것은 분명 여옥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고상지는 밤늦게 어떤 여인이 홀로 집으로 찾아온 것을 보고 놀랐다. 그동안 고상지는 박지의 뇌물이 되어 걸어오는 여인이나 겁박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여인과 교접했을 뿐, 스스로 그것도 한 밤 중에 제 발로 찾아온 묘령의 여인은 처음이어서 아주 당황스러웠다.

뉘신지? 어디서 뵌 것 같긴 한데.”

군신지 부인 수경이라 하옵니다.”

, , 후누 장군의 그 유명한 미색, 아니 미인 부인이시구나. 그런데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로?”

어느 장례식에서 수경부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앞모습보다 그녀의 뒷모습이 더욱 매력적이어서 당시 고상지의 중추신경에 뚜렷이 각인된 여성이었다.

오늘밤은 절 믿으셔도 됩니다.”

, 그럼요. 난 언제나 사람을 믿는 편이지요.”

고상지 도독은 지난 아리수 전쟁 이후 얼떨결에 대가야에 도독으로 눌러 앉아 진수성찬만 먹다보니 몸이 비대해져 걸음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평생 무골로만 살았던 고상지는 국정에는 관심이 없고, 뇌물을 좋아하고 골패와 주색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가야가 너무 좋았던 것이다.

고상지는 수경을 맞아들여 사랑채 침실로 통하는 광 안으로 인도했다. 어둑신한 광 한 칸에는 뇌물로 받은 쌀과 철정이 산더미처럼 쟁여져 있고, 다른 칸에는 융단, 비단, 유향, 호추, 황금, 은자, , 자기, 종이, , 서각(물소뿔), 상아, 각종 무구류 등이 쌓여져 있었다. 12국 가야뿐만 아니라 중국, ,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도 청의 끈을 달고 들어온 물품이었다.

수경은 그 중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를 골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머, 예쁘고 매끄러워라.”

역시 부인의 눈이 높소. 가야 최고의 미인에겐 역시 최고급인 상아목걸이가 어울리지. 가지시오.”

고상지는 직접 부드럽게 빛나는 상아목걸이를 수경의 목에 걸어주며 자연스레 그녀를 침실로 유도했다. 고상지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비단금침이 놓인 황동 침대에는 비만한 고상지가 벌거벗은 몸으로 돼지처럼 나자빠져 수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상지가 수경을 가늘게 실눈을 떠서 보다 알몸으로 벌떡 일어났다.

고상지가 수경을 보며 감탄하며 말했다.

오늘 밤 가야 최고의 미인을 보도다.”

황송하옵니다.”

황송할 것까지는 없고. 속미인은 따로 있으니 옷을 벗어 보시게.”

, 벗기 전에 청이 있습니다.”

청이 무엇인가?”

제 아이 꺽감을 고구려로 보내주십시오.”

아니, 그럼 고구려로 가기 위해 박지 아이와 경쟁한다는 그 꺽감이 자네 아이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수경은 산처럼 이립한 대근과 왕방울만한 부랄이 덜렁거리는 도독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고상지 도독이 고개를 갸웃하며 수경에게 말했다.

너의 청을 받기 전에 박지 집사가 먼저 그 상아목걸이를 주면서 자기 아들 구야를 꼭 고구려로 보내달고 청을 넣어 내가 이미 허락했네.”

청은 변개할 수 있는 법, 소첩의 소청을 굽어 살피소서.”

, 참 난감하네. 그동안 박 집사가 입안 혀처럼 내 일을 봐주었는데 말이야.”

박지 집사의 아들 구야에 대해 아십니까?”

지 애비를 닮아 잔꾀가 많고 예의가 없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네.”

거꾸로 알고 있네요. 거련왕자보다 한 살 위인데다 잔꾀가 많은 게 아니라 바보 칠뜨기이에요. 이불에 오줌을 자주 싸서 키를 쓰고 동네방네 소금을 얻으러 다니는 아이로 소문이 자자하고요. 그 나이에 아직도 수저질을 잘 못해 잔나비처럼 손으로 밥과 반찬을 집어 먹는답니다. 그런 멍청한 아이를 왕자와 함께 동무를 붙인다면 광개토대왕은 반드시 추천하신 도독님을 벌하실 거예요. 반면에 우리 아이 꺽감은 거련왕자와 나이가 같은데다 쇠를 잘 다루어 칼과 화살을 직접 만들 뿐만 아니라 활을 쏘면 백발백중 주몽이에요. 사서삼경을 줄줄 암송하고 자경문을 읽고 스스로 삼가기 때문에 능히 거련왕자의 좋은 동무가 될 수 있는 아이랍니다.”

, 구미가 당기는 아이구만. 내일 조정회의에서 가야 아이를 선발해 고구려로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오늘밤 다시 고민해 봐야겠는 걸.”
그럼, 지금부터 침상에서 전전반측 깊은 고민에 푹 빠져 보세요.”

수경은 멀리 주산이 보이는 어라궁에서 윗저고리를 벗었다. 치마말기로 눌린 몽실한 젖가슴의 윗부분이 드러났다. 그녀가 치마말기를 풀자 하얀 속고쟁이만 남았다.

고상지가 굵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경이 속고쟁이까지 내리자 가야최고 미인의 알몸이 스스로 빛을 발하며 눈부신 자태를 드러내었다.

수경은 다소 이국적인 늘씬한 체형에다 숨이 막히도록 황홀한 가슴과 엉덩이를 소유하고 있었다.

, 후누 장군은 복 받은 남자로군. 밤마다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을 끌어안을 수 있으니.”

고상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상지는 멀리 북방에 떨어져 있는 호족 절노부 출신의 아내를 생각했다. 늘씬한 수경과 달리 참새처럼 작은 아내는 금기가 많았다. 쟁반만한 손으로 아내의 가슴을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지 못하게 했다. 가슴은 위로 부드럽게 쓰다듬되 황소만한 입으로 젖꼭지를 아프도록 오래 빠는 행위는 안 된다. 특히 거구에 대근을 가진 고상지가 아내의 엉덩이를 망가지게 하는 후배위는 더군다나 안 되고 다리를 엇각으로 벌리는 등의 이상한 행위도 골반에 이형을 일으키니 더더군다나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것 저 것 다 빼버리니 별로 할 게 없어 잠자리는 늘 맹송맹송했다.

그렇게 절노부의 호족 아내에게 쇠사슬처럼 매여 있다가 비록 작은 나라지만 한 나라의 제왕 자리에 올라 마음먹은 대로 여인을 탐하니 세상에 이런 즐거움이 없었다. 엄격한 북방나라에서 자유분방한 남방의 여인들로부터 각색의 독특한 취향들을 맛보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달리고 달렸던 거였다.

수경이 고상지에게 말했다.

도독님의 온몸에 위엄과 위풍당당함이 넘쳐흐릅니다.”

고상지가 만족한 어투로 말했다.

과연 그런가?”

몸으로는 천하의 주인 광개토대왕도 따라올 바 못 됩니다.”

대근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감히 그런 무엄한 말을!”

수경이 맹랑하게 말했다.

벗으면 똑같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위풍당당한 체구와 말만한 대근은 태왕도 도독님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설마 그럴까?”

수경은 속으로는 이 놈아, 설마가 사람 잡는다. 네 놈이 내 아들을 단칼에 죽인 것을 그냥 둘 줄 알았더냐. 네 놈이 죽는 꼴을 이 두 눈으로 꼭 보고야 말겠다.’고 입술을 사려 물었다.

설마라뇨. 절륜의 정력 앞에는 천하의 태왕이라도 어림없지요.”

수경은 옥문을 죄며 고상지의 귀에 듣기 좋은 말들을 흘려 넣었다.

하긴 폐하는 천하정벌에만 관심이 있으시지 밤농사에서는 별 시원하시겠냐구.”

고상지는 광개토대왕에게 불충인 줄 알지만 내심 싫지는 않았다.

고상지는 이마와 가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산처럼 이립한 대근과 왕방울만한 부랄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듣자하니 제가 입양한 아이 꺽감이 하령왕의 아이라는 소문이 들리던데요.”

당치도 않는 소리, 왕비가 애를 낳자마자 내가 당석에서 직접 칼로 그 애를 죽였지.”

수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어이 네 놈의 입으로 내 아이를 죽였다는 말을 듣는구나. 가여운 아가야. 이 어미를 용서해줘. 너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 데 네 에미는 너를 죽인 이 원수와 교접을 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하지만 기다려 다오. 머잖아 태어나자마자 네 생명을 앗아간 이놈을 반드시 죽여 이놈의 뼛가루를 네 무덤 위에 거름으로 뿌려주마. 그녀의 얼굴에 있던 결연한 빛이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회색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입에서 갑자기 충치로 인한 구취가 심하게 느껴졌고 위에서 썩은 마즙 냄새가 올라오는 듯했다. 비만한 몸에서 흐르는 불쾌한 체액의 냄새와 수많은 여인을 농락했던 그 더러운 여운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동안 수경이 고상지를 염두에 두고 미워한 것도 아니고 앙금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예 괴로운 추억을 지워버렸는데, 아니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의 말을 들으니 옛 기억이 아프게 되살아나면서 언젠가 반드시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반드시 죽여야 할 절대적 원수로 확정되고 말았다.

, 그렇구나. 그럼, 도독님이 왕비와 통정한 대가로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말은 헛소문이 맞군요.”

가야 놈들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로 입방아를 찧어댄단 말인가?”

함은요. 그 때문에 오히려 우리 가야인들은 도독님을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이런 말이 태왕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나는 그날로 즉살이야. 그런 흉악한 말은 꿈속에서라도 하지 마시게.”

고상지의 대근이 옥문 안에서, 왕방울은 옥문 밖에서 시르죽는 느낌이었다. 수경이 다시 용기를 내어 요분질을 쳤다.

알겠사와요. 전 도독님만이 진정한 제 서방입니다.”

수경은 미소 속에 날카로운 칼을 숨긴 채 죽을힘을 다해 아양을 떨었다.

피로 산 나의 아들 꺽감의 고구려행을 위해서야. 나는 꺽감의 참 어머니가 되고 꺽감은 나의 참 아들이 될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