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양왕용의 시 읽기
작성일 : 2021.02.05 12:20
은쟁반 있는 그림
/유병근
신발장과 구두숟가락과
휴지통이 하나
문밖에 서성거리는 어둠 속에
빗자루가 서 있다 어둠이 조금 보인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한때를 듣고 있나
실낱같은 무엇이 지나가는 소리
만질 수 없고 맛 볼 수도 없는
가늘게 벌레 우는 소리를 보고 있다
개불알꽃이 혼자 피어 있다
그럴싸해 본 적이 없는
요즘은 어쩌다 강물 소리가 깊다
개불알꽃이 핀 마당귀에서
개불알꽃의 계절을
강아지 한 마리 서성거린다
강아지의 불알은 보이지 않는다
알 것도 같다
저녁 어스름이 지나가고 있다
-계간『부산시인』2016년 봄호
*유병근(경남, 양산) 시인, 수필가, 경남 통영 출생, 1970년 <월간문학>등단, 시집《돌 속에 꽃 이 핀다》, 《설사당꽂이 떠나고 있다》, 《통영벅수》,《어쩌면 한갓지다》 등. 부산시문화상(문 학부문), 올해의 수필인상 등 수상
유병근 시인은 연세도 80을 훌쩍 넘겨 부산 지역 시인 가운데 가장 어른이다. 1950년대 초반 6.25전쟁기 부산의 젊은 시인들이 주도한 《신작품》 동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1970년 등단을 했다고 해서 그를 70년대의 시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수필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문하생도 많다. 그의 수필은 신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적 산문에 가깝다.
한편 그의 시는 이미지의 전개 과정이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의 회화 같은 경향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최근 들어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연세에 비하여 젊은 세대에 못지않은 긴장감을 유지 하고 있다. 이러한 비결은 그가 부산에서 창간된 계간 시전문지 ⟪사이펀,2016년 여름)⟫가 마련한 시인과 독자와의 대화 형식의 모임에서 사물에 대한 철저한 인식으로 시인 자신이 사물이 되어 상상력을 발동한다는 시작의 방법론에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은쟁반이 있는 그림」은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과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 시를 형상화 하고 있는 시적 기법은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이다. 사물과 사물들의 연결에 비약이 심하여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의식의 흐름에 의해 사물의 등장이 무질서 하다고 해도 이 시의 전개 과정을 1행에서 8행까지와 9행부터 17행까지로 양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 단락은 주로 실내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이 등장한다. 시적화자가 시간적으로 어둠이 다가오는 공간에서 주위에 보이는 신발장, 구두숟가락, 빗자루 등 주로 실내에 있는 사물들을 대상으로 시적 상상력을 전개한다. 그의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는 ‘실낱같은 무엇이 지나가는 소리’ 즉 아주 미세한 소리와 ‘가늘게 우는 벌레 소리’까지 시각화 하고 있다. 그러나 9행에서 외떡잎 야생화인 개불알꽃이 등장한다. 개불알꽃은 분홍꽃 모양이 개불알 모양이라서 명명된 꽃으로 5-7월에 핀다. 개불알에서 연상되는 강아지가 마당 한 쪽에서 서성거린다고 하고 있으나 이것이 사실적인 풍경이라기보다 시적화자의 의식 속의 풍경일 수도 있다. 저녁 어스럼이 지나가는 시간의식의 표출로 시는 마무리되고 있다.
이렇게 유 시인의 작품을 통하여 독자들은 환상적이면서 전혀 은쟁반과 관계없는 풍경에서 시적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양왕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