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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3)

작성일 : 2021.02.01 11:52

대가야제국의 부활

/김하기

 

1부 하지태왕과 장수왕(3)

대가야에서는 만삭인 여옥왕비가 아이를 낳으러 친정인 적화로 가고 있었다. 고상지 도독과 열 명의 고구려 호위병이 철통같은 감시를 하는 가운데 가마는 구름에 달가듯이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넜다. 고상지는 해가 저물기 전에 적화에 도착해야 한다며 가마채를 멘 가마꾼들을 채찍질로 채근했다. 가마는 어느새 적화마을 어귀까지 왔다.

여옥은 가마에 드리운 옥 주련을 걷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러기 떼가 날아간 해질녘의 가야산의 하늘은 핏빛으로 붉게 물든 것 같았다. 여옥은 남산만한 배를 움켜쥐고 가야산을 보며 원망의 눈물을 흘렸다.

정견모주님, 어찌 이다지도 매정하십니까. 세시와 절기 때마다 그렇게도 치성을 드렸건만 왜 이 가마를 다시 꽃상여로 만드시려는 겁니까.’

여옥은 배를 쓰다듬으며 뱃속의 아이에게 중얼거렸다.

가엽고 불쌍한 내 아이야. , 서산으로 넘어가는 붉은 노을처럼 너와 함께 저승으로 가자꾸나. 먼저 간 네 형을 만나러 가자.’

가마는 기우뚱거리며 위태롭게 농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이 다리를 건너 꽃가마도 나가고 꽃상여도 나가곤 했지. 이제 여울을 건너면 너와 나는 저승으로 간다. 아이야, 이 어미는 너와 함께 그저 명아주나 강아지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싶었어. 헌데 운명은 거스를 수 없나 보다. 아무리 경문에 빌고 몸을 굽히고 피해도 운명에는 당해주어야 하는지, 너의 태몽대로 죽음의 길을 가고 있구나.’

대왕과 혼례를 치른 밤, 열여섯의 나이에 첫 아이를 회임했다. 하령은 전쟁과 외교로 분주해 늘 궁궐 밖으로 돌았고, 어린 왕비는 왕을 대신해 홀로 감당해야 할 잦은 의례와 궁중 일로 뱃속의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예정보다 일찍 태어나 사산한 첫아이는 작은 금관에 넣어져 안태고향 적화 뒷산에 묻혔다. 여옥은 아이를 따라 가겠다며 흙을 파헤치고 울부짖다 넋을 잃었다. 넋을 잃은 동안, 비몽사몽간에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가 나타났다.

황금옷에 타래머리를 하고 보관을 쓴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하얀 옷에 산발한 정견모주의 모습이 여옥이나 다름없었다.

정견모주가 말했다.

하령은 가야의 시조인 나 정견모주와 천신 이비가지를 무시하고 천군과 신녀를 홀대했다. 오로지 제 힘으로만 왕업을 일으키려 하니 그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첫아이에게는 그나마 금 궤짝을 주었지만 둘째에게는 나무궤짝을 주겠노라.”

정견모주가 나무궤짝을 주자, 여옥이 놀라 그녀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애원했다.

정견모주님, 제가 정성을 다해 치성을 올릴 테니 둘째만은 살려주십시오. 제발 이 나무궤짝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정견모주는 매정하게도 여옥에게 관과 같은 나무궤짝을 남기곤 홀연히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나니 여옥의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불길한 태몽이었다.

여옥은 하령대왕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하령은 대수롭지 않게 껄껄 웃어넘기며 말했다.

꿈은 반대니 길몽이오. 사실 난 꿈이나 미신 따위는 전혀 믿지 않소.”

천군과 신녀도 말했어요. 정견모주와 이비가지는 우리 대가야의 시조신이신데 윗대에 비해 너무나 소홀이 모신다고요.”

천군과 신녀가 산신 정견모주와 천신 이비가지를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무속세력을 불리고 밥벌이하기 위한 수단이오. 신화와 전설은 꾸며낸 허황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소.”

신들의 노여움을 살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더욱이 왕손의 안위가 걸려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않겠습니까.”

아이는 또 낳으면 되는 것, 첫 아이의 죽음 때문에 너무 상심 마시오.”

하령은 여옥에게 무뚝뚝하게 한 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왜로 떠났다.

여옥은 하령대왕의 불과 같은 성격을 알고 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뜻한 바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다. 그는 평생 고구려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했다.

할아버지 상금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전해 참수당하고 부왕 금림은 고구려에 굴복해 왕비를 고구려에 첩으로 보냈다. 금림왕은 조공과 조알로 고구려 신라 백제 중국을 사대했으며 부드러운 외교술로 왜와 12국 가야연맹체를 이끌어 가야를 신라와 백제에 버금가는 부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백제와 함께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고구려에 항복해 목숨을 구걸했으나 끝내 무자비한 소수림왕의 칼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하령은 어머니를 고구려왕의 첩으로 보내고도 개처럼 목숨을 구걸하다 참수당한 부왕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부왕이 죽고 난 뒤 왕이 된 하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천군이 성역화한 솟대와 소도를 불태워 없애고 제정일치를 주장하는 무리들을 부왕의 무덤에 함께 순장시켜 버린 것이었다. 천군과 신녀들이 평소 부왕에게 태자 하령은 성격이 난폭하고 조야하니 차라리 성격이 온화하고 호학하는 동생 차령에게 종통을 물려주셔야 합니다고 진언한 까닭이다.

하령이 믿는 것은 오로지 가야철기군밖에 없었다. 막강한 대가야 철기군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대한 조공과 조알을 폐지했고 12국 가야연맹체를 힘으로 눌러 대가야 아래 굴복시켰다.

여옥은 철기군의 무력에만 의존하는 하령이 듬직하다기보다는 늘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는 휘어지지만 참나무는 부러지기 마련, 판갑옷을 입고 말갑옷을 씌워 정복전쟁으로 나가는 것보다 인민의 생활을 평안히 하는 내치에 힘을 쓰시면 좋으련만.’

여옥은 하령을 곁에 잡아두고 싶지만 그를 잡는 것은 마치 바람을 붙잡아 새장 속에 가두어두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그녀의 운명을 삭이면서 정견모주 사당을 찾거나 고향마을 뒷산을 찾았다. 의지가지없는 여옥의 마음과 발걸음은 가야산 자락 고향 뒷동산의 아기무덤에 가 있었다. 그녀는 무덤 앞에 엎드려 잡초를 쥐어뜯으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진 가여운 꽃잎아,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너는 어둠 속으로 내려갔구나. 서러워라, 너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이 길어진 나리꽃만 네 무덤을 지키고 있구나. 풀잎새에 구르는 이슬들아, 죽음은 차가운 겨울과 같다. 우리 몸은 이슬에서 와서 이슬로 사라지니 꽃들이 지고 또다시 꽃이 피어나도 너만은 오지 않는구나.’

그녀는 몇 개월 동안 미친 듯이 아기무덤만 찾아다니다 문득 가야산을 쳐다보았다.

정견모주님.”

여옥은 가야산을 보며 정견모주가 나타난 생시 같은 꿈을 떠올리며 말했다.

모주님, 대왕이 치성을 드리지 않는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모주님도 당신의 후손이 창대하길 원하시지 뇌질왕가의 대가 끊어지기를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제가 지극정성을 다 하겠습니다. 부디 아이 잃은 가여운 이 어미를 굽어 살피사 어서 둘째를 주시옵소서.”

여옥은 허물어진 가야산 정견모주 사당을 복원하고 백 번의 제사를 올렸다. 하령왕은 그런 여옥을 보면서 쓸데없는 짓이라고 끌탕을 치면서도 일부러 막지는 않았다.

여옥이 가야산신 정견모주를 잘 모신 덕분인지 백 번의 제를 다 채우기도 전에 둘째아이를 회임했고, 하령왕도 빠른 시일 내에 부왕 때 무너진 국가 체제를 복원해 나갔다. 하령은 철기군을 바탕으로 열두 가야의 맹주가 되었고, 금관가야에 있는 왜의 임나일본부를 임나왜소로 격하시켰다. 대방과 낙랑이 함락된 이후 침체되었던 철교역도 살아났고, 대가야는 건국 이래 최대의 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백제, 신라, 가야 삼한이 동맹하여 아리수에서 고구려와 건곤일척의 대전을 벌이다 고구려에 대패해 하령도 부친의 길을 따라 참수당하고 삼족이 멸하는 대참변을 당했다.

여옥의 친정인 갈성씨는 다라국(다라국은 합천으로 비정되고 적화는 현재 합천군 야로면이다.) 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이다. 따라서 여옥의 이름은 갈성여옥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란에 갈성씨도 멸문지화를 당하고 집은 불타 없어졌다. 잡초가 웃자란 마당에 깨진 기왓장과 타다 만 서까래가 뒹굴고 있었다.

여옥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뒷간 외양간으로 들어갔다. 고상지와 병사들도 홰를 켜고 따라 들어왔다.

고구려 병사들이 움집인 외양간을 둘러싼 삼엄한 경비 속에 여옥은 짚바닥에서 몸을 틀며 진통을 했다. 여옥이 출산의 고통으로 신음소리가 나오자 입에 베수건을 물었다. 여옥의 눈에는 하령과의 첫날 밤 합환주를 나누던 모습과 참수되어 바라보던 하령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회임해서 회임하례를 받았던 때와 사산한 첫 아이를 붙들고 깨우느라 흔들던 장면, 온갖 허상들이 불의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물의 환영처럼 떠오르다 잠겨갔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바람과 같고, 태어나고 죽는 일이 안개와 같은 것임을 진작 몰랐던 것일까. 이 아이가 죽으면 나도 입에 문 베수건을 목에 걸고 자진하리라.’

고통과 진통으로 비몽사몽 간에 여옥은 잠시 혼절했다. 꿈에 타래머리에 보관을 쓰고 황금옷을 입은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나타났다. 모주의 앞에는 전에 본 나무궤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여옥은 정견모주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모주님도 너무하십니다. 제가 어라성과 가야산에 있는 허물어진 정견모주 신당을 복원하고 모주님께 그렇게 온 정성을 다해 치성을 드렸건만 죽은 우리 아이를 담아가시려고 다시 나무궤짝을 가져오신 것입니까?”

천군과 신녀를 죽이고 신당을 허물은 하령을 생각하면 둘째아이도 죽여 마땅하나, 내가 너의 갸륵한 정성을 생각해 마음을 바꾸었다. 나무궤짝을 열어보아라.”

여옥은 정견모주의 말대로 나무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철 궤짝이 들어 있었다.

모주가 다시 말했다.

철 궤짝을 열어보아라.”

여옥이 힘을 다해 무거운 철 궤짝 뚜껑을 열어젖히니 철 궤짝 안에 금 궤짝이 들어 있었다.

여옥이 금 궤짝에 실어 보낸 죽은 아이를 떠올리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 궤짝은 우리 첫 아이에게 준 것이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금 궤짝을 열어보아라.”

여옥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간신히 금 궤짝 뚜껑을 열자, 그 안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명아주 같이 작고 까만 눈동자로 여옥을 쳐다보았다.

여옥은 그 새가 너무나 귀여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새는 여옥의 손바닥에 포르릉 날아올라 작은 날개로 날개 짓을 하며 연한 부리로 손바닥을 톡톡 쪼았다.

, 정말 귀여운 새로구나.’

정견모주가 말했다.

우각성 장군별 자리를 타고난 이 아이는 나무의 덕과 철의 강함과 금의 고귀함을 입을 것이다. 대가야제국을 부활시켜 사해에 드러낼 것이니 잘 기르도록 하여라.”

아니,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을 아이에 대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견모주가 말했다.

가야산신인 나 정견모주와 태양신 이비가지가 이 가야새를 지킬 것이다.”

여옥이 그 새를 잡으려 하자 새는 여옥의 손을 떠나 정견모주의 왼쪽 어깨 위에 날아 앉았다. 정견모주는 어깨에 앉은 새를 손에 올려 하늘로 힘차게 날려 보냈다.

날아라, 가야새야. 너의 날개로 온 세상을 덮어라!”

작은 새는 정견모주의 어깨에서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작은 새는 가야산을 한 바퀴 선회를 하더니 어느 새 몸집이 커지고 꼬리가 길어져 큰 봉황이 되었다. 봉황이 다시 가야산을 한 바퀴 선회를 하자 거대한 대붕이 되어 천하를 뒤덮었다.

여옥이 꿈인 듯 생시인 듯 환영에서 깨어났다.

출산의 환시로 일말의 희망이 보인 듯했으나 꿈을 깨어보니 칼을 든 병사들이 외양간 움집을 에워싼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다시 출산의 진통이 물너울처럼 밀려왔다. 유모도 산모도 없이 홀로 출산에 들어간 여옥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

여옥의 눈에 검은 천장이 샛노랗게 보이자 여옥은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 복부와 가랑이에 힘을 주었었다. 온몸의 기운을 다 쏟아내자 골반 뼈가 벌어지며 뭉근한 생명이 빠져나왔다.

여옥은 아이를 받아내어 잇빨로 탯줄을 잘랐다. 그리고 깨끗한 짚을 골라 아이를 뉘였다.

하령왕이시여, 당신을 닮은 잘 생기고 건강한 왕자님입니다. 대가야의 적통이십니다.”

갓난아이는 움막을 무너뜨릴 듯이 우렁찬 울음을 터뜨렸다. 여옥이 사산한 첫애와는 달리 건강한 아이를 출산한 기쁨에 젖어 아이에게 젖을 덥석 물렸다.

, 이 아이를 어찌할꼬.”

여옥이 아이를 안아 흔들고 젖을 물리며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외양간 움막 문이 덜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상지와 병사들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순간 피가 흘러내린 짚 덤불을 헤치고 쇠 똥간에서 아이를 안은 한 여자가 땅 속에서 귀신처럼 쑥 올라왔다.

여옥이 놀라 아이를 꽉 붙들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니, 너는?”

후누 장군의 부인 수경이었다. 그녀도 자기의 갓난아이를 안고 울고 있었다.

마마,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왕자님을 주시고 제 아이를 받아가세요. 왕자님은 우리 대가야가 잘 키우겠습니다.”

수경이 여옥의 아이와 바꾸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마마, 부디 불쌍한 제 아이를 꼭 기억해주세요.”

여옥이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수경이 여옥의 아이를 안고 다시 쇠똥간 짚더미 속으로 내려갔다. 여옥이 재빨리 짚으로 덮어 바닥을 가지런히 했다.

여옥은 마치 허깨비가 땅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사라진 것 같았다. 어미가 바뀐 수경의 아이가 불에 덴 듯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응애, 응애, 응애

어느새 여옥의 옆에 고상지와 고구려 병사들이 다가와 칼을 빼들고 서 있었다.

고상지가 뭔가 수상한지 바닥을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고상지는 바닥에 흥건한 피와 탯줄, 태반을 확인보고서야 여옥에게 말했다.

이제 아이를 건네주시죠. 폐하의 명을 집행하겠습니다.”

여옥은 수경의 아이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이 놈들아, 이 아이를 절대 내줄 수 없다.”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고상지는 여옥의 품에서 아이를 매정하게 빼앗아 당석에 목을 잘랐다. 울던 아이의 울음이 그치고 아이의 피가 흘러 짚더미에 스며들어갔다.

, 저 칼에 수경의 아이가 아니라 차라리 내 아이가 죽었더라면.

수경아, 수경아.’

여옥은 수경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여옥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고향 적화의 봄 동산에서 수경이와 함께 뛰놀고 있었다. 웅크린 겨울 끝에 고향의 나무들도 봄의 기지개를 펴고 있었고 개여울에는 잔 햇살이 반짝반짝 했다.

둘은 봄 동산에 나란히 앉아 서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경아, 우린 커서도 만날 수 있을까?”

같이 사는 마을에서도 만나기 힘든데 어른이 되면 더 힘들겠지.”

왜 우리는 만나면 안 되는 걸까?”

집안이 달라서 그래. 여옥이 너는 높은 집안, 나는 낮은 집안.”

그래도 너네 집은 우리보다 돈도 많고 너는 나보다 아는 것도 많잖아.”

그렇다고 내가 너보다 높지는 않아.”

내가 볼 땐 네가 나보다 훨씬 높은 것 같애.”

여옥은 신분은 호족으로 높지만 가난했고, 수경은 신분은 평민으로 낮지만 재산이 많은 집안이었다. 여옥은 다라국의 명문 호족 갈성씨 집안이지만 대가야의 금림왕과 맞서다가 몰락한 호족이었다. 수경은 골편수인 아버지를 따라 신라 달천 쇠부리 마을에서 가야 다라국 적화로 옮겨온 객가로 평민이었다. 가야사회는 엄격한 네 계급의 신분제도가 있어 왕족 호족 평민 노예가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 여옥과 수경이 만날 수 있는 건 열흘에 한 번 가야금의 일종인 쟁을 배울 때뿐이었다. 쟁을 배우고 난 뒤 둘은 뒷동산에 올라 적화마을을 보면서 정다운 얘기를 많이 나눴다.

여옥은 수경이 골편수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세상 구경을 많이 하고 들은 것도 많아 수경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쟁을 타는 것보다 즐거웠다. 수경은 좁은 적화에 갇혀 사는 소녀에게 크고 넓은 세상의 꿈을 꾸게 했다. 새들은 깃을 털고 눈부신 날개 짓을 하고 있었고 마을에는 구수한 밥 냄새와 된장국 냄새가 흘러넘쳤다. 인동초가 올라간 돌담 골목길에는 주막강아지 골목강아지들이 즐겁게 어울려 뛰어놀고 있건만, 신분이 다른 여옥과 수경은 잡았던 손을 놓고 아쉽게 헤어져야 했다.

혼절했던 여옥의 정신이 간신히 돌아왔다.

, 동갑내기 친구 수경아.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보다 생각도 마음도 훨씬 크고 넓구나.’

 

군신지 후누 장군과 수경 부인은 자신의 아이를 대신 죽이고 살린 하령과 여옥의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수경은 후누와는 달리 400년 가야왕의 종통을 보존했다는 기쁨보다 자신의 아이를 잃은 슬픔이 훨씬 더 컸다. 더욱이 수경의 마음은 아이를 볼 때마다 태어나자마자 단칼에 비명횡사한 자기 아이가 생각나서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하령대왕과 여옥왕비의 왕기를 받고 난 아이는 늠름하고 잘 생겼다.

수경이 젖을 물릴 때마다 내 아이를 희생할 만큼 이 아이는 귀한 아이야. 나는 기쁘게 그 일을 했어.’라고 뼈아프게 확인을 하고 다짐을 하건만 새 아이에 대한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대신 이 음모를 꾸민 남편 후누에 대한 원망만 켜켜이 쌓여 갔다.

가족보다 종통이 우선라고? 그게 뭔데 내 아들을 희생하는 거란 말인가!’

난 내가 낳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내가 낳은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싶단 말이야. 난 그애의 엄마이지 400년 종통이고 왕가의 적통인 이 아이의 엄마가 아니란 말이야. 나라는 망하건 흥하건 난 배냇물도 마르지 않은 그 애, 그 애의 엄마인 거야.

후누가 수경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우리가 이 아이를 키웁시다.”

절대 안 돼요. 이 아이를 보면 죽은 우리 아이가 떠올라 견딜 수가 없어요. 다른 곳에 맡기고 유산한 것으로 처리해요.”

여보, 이 번 일은 내가 정말 정말 미안하오.”

“400년 대가야의 적통을 잇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서요.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난 애와 비명횡사한 비천한 우리 애와 비교할 수 있나요.”

수경은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성격이 바뀌었다. 후누와 잠자리도 같이 하려 하지 않았다. 원래 성격을 냄새로 말하면 톡 쏘는 들장미 향기지, 서리 맞고 피는 국화향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향기는 거두고 가시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수경, 하령대왕의 마지막 눈빛만 아니었다면......”

하령대왕은 참수되기 전 아주 잠시 군신지 후누장군을 쳐다보았다. 강렬한 눈빛이 화살처럼 날아와 후누의 가슴에 박혔다. 그 화살은 후누의 가슴에서 박혀 썩고 있는 화살이었다. 부처는 죽을 때 미소 하나로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을 전했다던가. 후누는 하령대왕의 눈빛에서 단 한 가지, ‘네가 종묘사직을 지켜라는 유언을 읽었다. 후누는 군신의 의는 태산처럼 무거우므로 부모의 정은 가벼이 해야 한다며 간신히 아내를 설득하고 또 설득시켜 이번 거사를 감행했다.

후누가 창밖의 감나무를 보며 수경에게 말했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야겠소.”

늦가을에 감나무에 감은 다 떨어지고 까치집 위에 까치감 하나가 달려 있었다.

희한하게도 까치들이 저 감 하나만은 쪼아 먹지 않고 남겨두었소. 감이 저리 큰데도 떨어지지도 않는 것도 신기하고. 저대로 곶감이 되어 겨울을 날 것 같소.”

후누는 큰 까치감을 조용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이의 이름을 꺽감이라 합시다.”

꺽감이오?”

큰 감이라는 뜻이오. 꺽쇠, 꺽지는 큰 쇠, 큰 물고기를 뜻하지요.”

어리석은 사람......’

수경은 무심히 하늘 너머 감나무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전에처럼 후누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부터 내 사랑은 줄이 끊어진 쟁처럼 소리가 없으리라.

둘은 아이를 한 달간 숨겨 키우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국경 너머 수경의 친정인 신라국 달천 쇠부리 마을로 보내기로 했다.

 

여옥이 태왕의 가슴을 찌르자 태왕은 몸을 살짝 옆으로 피하며 여옥의 손목을 꺾어 은장도를 뺏었다.

허어, 이 작은 은장도로 천하의 광개토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소?”

“......”

이 날의 암살만을 기다려온 여옥은 너무도 허무하게 장난처럼 끝나버려 죽음의 두려움보다 오히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소후, 난 항상 암살을 그림자처럼 달며 살아 왔소. 특히 여인과 잠자리할 때는 더욱 조심을 하지.”

광개토는 그동안 사방의 적들이 보낸 자객의 칼과 활을 맞거나 피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 중에서도 온몸으로 달려드는 여인들의 암살이 잔인했다. 비려가 보낸 미인과는 일시 동거를 하다 그녀가 탄 독약을 마시고 가사상태에 빠져 닷새 만에 깨어난 적도 있었다. 후연의 모용이 보낸 여인은 독침으로 광개토의 허벅지를 찔렀으나 다행히 혈에 깊이 들어가지 않아 살을 도려내어 살았다. 아직도 왼쪽 허벅지 상처에는 살이 다 차오르지 않았다. 가장 생명에 위험을 느꼈을 때는 왜가 성병에 걸린 아름다운 기생을 보내 며칠 밤을 품은 후 아랫도리가 썩을 뻔한 일이었다. 다행히 화타와 같은 명의를 만나 석 달간 꾸준한 치료를 받은 끝에 근치됐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오. 하지만 환도성에 머무는 한 그 마음을 버리시오. 그리고 이 은장도는 내 것이 아니니 돌려주겠소. 앞으로는 남을 해하는 사용하지 말고 온전히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때만 이것을 사용하시오.”

도대체 은장도를 되돌려주는 이 남자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나의 척족들을 도륙하고도 뻔뻔하게 나를 탐하려는 이 자의 정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여옥은 은장도를 돌려받으며 수치와 굴욕감,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안도감과 호기심 등 각종 착종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소후, 우리의 신방을 차리는데 또 다른 장애물이 있소?”

“......”

광개토는 여옥의 마지막 고쟁이를 벗기려고 했다.

잠깐만요, 폐하. 신녀가 가야 아이 하나를 입양하지 않으면 거련이 또 아플 거라고 말했다지요.”

무당의 말을 다 믿지는 않소. 하지만 거련과 동무할 수 있는 똘똘한 가야 아이를 왕궁으로 불러들일 생각이오.”

소첩이 그 아이를 데려오게 해 주세요. 천애고아인 저는 낯설고 추운 고구려 땅에서 그냥 서 있어도 발목이 시립니다.”

여옥은 광개토의 손을 잡으며 젖은 눈으로 말했다.

발목이 시리겠지.”

폐하, 정녕 소첩의 눈물을 거두어 주실 수 있습니까?”

, 거두어 주리다.”

여옥은 그예 태왕의 품안으로 무너지면서 속절없이 눈물을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저와 가야아이를 거두어 주소서.”

태왕은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고 넓은 가슴으로 여옥을 품으며 말했다.

, 소후와 가야아이를 지킬 것을 약조하리다.”

저는 이제 하늘 아래 땅 위에 제 낭군은 오로지 폐하 한 분뿐입니다.”

알겠소, 소후.”

가슴에서 헤매던 태왕의 손이 다시 아래로 왔다. 고쟁이가 끌러지자 박꽃 같은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곡옥처럼 매끈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팔목과 등뼈를 지나 온몸으로 퍼지며 내면 깊은 곳에 맹수 같이 웅크리고 있는 성욕을 불러내었다.

태왕의 성욕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뒤엉킨 전쟁터에서 길들여졌다. 영토를 정복할수록 그의 성욕도 맹렬해졌다. 짐승이 뜯어먹어 살점이 떨어져 나간 뼈들이 널려 있는 곳에서 살아 있는 존재의 환희와 죽음의 욕망을 여인의 샅에서 풀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의미하며 죽음의 환희가 삶보다 더 맹렬한 욕망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여인과의 잠자리는 진정한 삶도 죽음도, 승자도 패자도 없는 끝없는 싸움터였다. 전리품에 대한 정복감은 일시적인 쾌락일 뿐, 벌거벗은 암컷과 수컷이 서로가 서로를 능욕함으로써 짐승으로 추락하는 허무와의 몸 섞음이었다. 여인의 몸 위에서 눈을 감으면 바닥 모를 절망감으로 빠져들었다. 태왕의 입술이 여옥의 입술에 포개지자 달빛에 달맞이꽃이 열리듯 그녀의 꽃잎이 벌어졌다. 살짝 벌어진 결에 심해에 내린 닻줄보다 더 팽팽해진 몸이 들어갔다.

태왕은 소후 여옥과의 몸 섞음도 단순히 전쟁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의 더러운 욕망이 땅 밑으로 끌고 내려갔다가 황홀한 환영이 욕망을 이끌고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라 성스런 천궁에 닿은 건 오늘밤, 이 시각이 처음이었다. 점성대 위로 유성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