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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대가야제국의 부활 (2)

작성일 : 2021.01.24 09:36

대가야제국의 부활

김하기

 

1부 하지태왕과 장수왕(2)

여옥왕비가 고구려로 떠나는 날이었다. 대가야의 마지막 희망인 하령왕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참살당하고 왕비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소후가 되어 떠나는 날, 가야의 하늘도 슬픈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그예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쳤다. 가야산 정상에 있는 가야의 시조신 정견모주의 사당은 벼락을 맞아 정견모주의 목이 떨어지고, 지산동 선영들의 묘역에는 물귀신이 나타나 무덤을 파헤쳐 무너뜨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에 온몸이 함뿍 젖은 여옥은 우레와 같은 선조선영들의 목소리가 그녀를 꾸짖는 듯해 가던 발길을 멈추었다.

비를 맞아 물귀신 형용을 한 고상지 도독이 여옥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갈 길이 멉니다. 어서 갑시다!”

광개토대왕과 함께 대륙을 메주 밟듯 누볐던 고상지는 폭우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가라말에 왕비를 태우고 호위무사들을 데리고 고구려로 떠났다.

집사(총리) 박지를 비롯한 가야의 문무백관들은 떠나는 왕비를 향해 울면서 엎드려 절했고-물론 몇 명은 우는 시늉만 하며 절을 올렸고, 백성들은 남편과 아이를 죽인 광개토대왕의 첩(소후)이 되려고 떠나는 정신 나간 왕비에게 손가락질에다 쌍욕, 군욕을 하며 돌을 집어 던졌다.

여옥은 죽고 싶었다.

남편을 비롯해 온 집안을 도륙한 원수의 집에 첩살이를 하러 가느니, 차라리 목을 매어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자진을 생각했지만 실낱같은 마지막 남은 희망 하나를 붙잡고 원수의 나라, 불구대천의 집단, 세상에서 더럽고 혐오스런 벌레 같은 인간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겼다.

 

후누 장군은 날이 저물기 전 불타는 듯한 가야의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 대가야는 정녕 멸망하고야 마는가!’

후누 장군의 저택은 아담하지만 솟을대문을 지나면 안채 지붕의 치미가 독수리 날개처럼 치솟아 장군댁의 위엄이 서려있었다. 대문에는 대가야의 문장인 삼지창 모양의 오동나무 잎이 그려져 있고, 마당 가운데 있는 연지 둘레에는 편백, 금송, 신이(목련) 정원수와 감, 오얏, 복사 과실수가 심어져 있었다.

오늘 군신지(국방부장관) 후누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호신지, 법신지, 공신지 세 명을 초청했다. 넷은 밑바닥 고배와 연결된 부드러운 곡선미를 지닌 가야토기에 정갈하게 담겨져 온 메, 탕국, 지짐, 조기 등 생일음식을 먹으며 대가야의 암울한 현실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건배!”

생일 술자리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후누가 잔을 들며 말했다.

부끄럽소이다. 사백년 묵은 가야 하늘과 가야산을 고스란히 구려놈들에게 넘겨주다니!”

아직은 아닙니다. 잔인하고 사악한 광개토와 고상지, 박지의 통치 하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 열두가야 연맹체가 똘똘 뭉쳐 싸우는 것 뿐입니다.”

맞습니다. 우선은 우리 가야땅에서 고구려의 율령을 강요하고 있는 배신자 박지를 먼저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소.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으니 좀 더 기회를 기다립시다.”

옳은 말이오. 고상지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 박지 한 명을 죽인다 한들 그들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단 뿔뿔이 흩어진 12가야연맹체를 다시 부활시키는 게 급선무입니다.”

결론은 고구려의 식민지가 된 가야를 독립시키려면 가야12연맹체를 든든히 하고 종국적으로는 다시 신라와 백제 등 우방국과 손을 잡고 해방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식사가 끝날 무렵 예상치도 않게 석양에 긴 그림자 하나가 저택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그는 대가야의 집사(총리) 박지였다. 박지는 대내적으로는 대가야 조정을 대표하는 집사 겸 이신지이고, 대외적으로는 상한기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 대가야의 이인자였다. 그가 집으로 들어오자 모두들 놀라 일어서서 일단 그를 상석으로 모셨다.

박지가 주위의 인물들을 둘러보며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허, 귀가 간질간질 하더니 그대들이 내 말을 하고 있었던 건가?”

당주인 후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그저 생일식사나 조촐하게 하자고 해서 모인 것뿐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막 을 시작할 참이었는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

후누 장군의 아내 수경이 술상을 들고 왔다.

박지가 수경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 역시 수경부인은 우리 대가야의 미인이야. 헌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만삭의 몸이었는데 언제 출산을 하신 겐가?”

박지가 수경의 몸 아래 위를 기분 나쁘게 훑어보며 말했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한 수경이 박지에게 술을 따르며 나지막이 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번 전란 때 놀라 그 후유증으로 유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수경부인이 그런 불행한 일을 겪은 걸 미처 몰랐네, 쯔쯧.”

박지 집사는 끌탕을 치며 수경의 따른 술을 단박에 들이켰다.

하긴 수경의 얼굴은 연지에 두둥실 피어오른 연꽃 같았지. 헌데 지금은 그늘에 말린 창포처럼 수척하구나.’

박지는 항간에 떠도는 유언비어를 떠올렸다. 고상지 도독이 칼로 베어 죽였다는 왕비의 갓난아이는 실상 왕비의 아이가 아니며 바꿔치기 한 중신의 아이라는 괴소문이었다. 박지는 괴소문의 발원지가 어딘지를 알아보려고 일부러 군신지의 집에 들른 것이다. 바꿔치기 한 아이는 여옥과 출산 기일이 비슷한 수경의 아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후누 정도의 인물이라면 하령왕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우직한 충신이다. 더욱이 그 마누라 수경은 왕비 여옥과 같은 고향 동무로 함께 순장을 하자면 무덤 속에 같이 들어갈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던가. 둘은 대가야의 종통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자기의 아이를 희생할 뿐 아니라 자신들도 무덤에 따라 들어갈 자들이다.

박지가 잔을 들고 말했다.

거참 이렇게 다들 모였으니 무슨 중신회의를 하는 기분이군. , 후누 장군의 생일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생일 술자리의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집사 박지가 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이제 삼족오가 높이 날며 대가야의 하늘이 새롭게 열리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

삼족오라면 고구려의 국조가 아닌가! 대가야의 국조인 까치가 날아야지 왜 삼족오가 뜬금없이 높이 나는가

신지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거 참, 신지들부터가 고구려에 대한 충성심이 없으니 나라꼴이 이 모양이지. 이제 우리는 고구려의 율령 아래 있고, 법적으로 가야인이 아니라 고구려 신민이오.”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후누 장군이 분위기를 바꿔 말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가야 백제 신라 사국을 통일한 통일군주이십니다. 고구려와 교역하면 우리 가야철도 더 많이 수출할 것이고, 백성들의 생활도 그만큼 윤택해질 것입니다.”

암요.”

삼족오 만세! 광개토대왕 만세!”

신지들도 마지못해 박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박지는 아첨이긴 하지만 신지들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친고구려파로 이번 고구려와의 전쟁에 반대해 하령왕에 의해 집사직에서 해임되고 투옥까지 되었다가, 종전 후 고상지 도독으로부터 대가야의 집사직을 재임명 받았다.

박지가 말했다.

왕비가 낳은 아이가 죽음으로써 뇌질 왕가는 이제 완전히 끝장났어. 씨가 말라버렸지. 우리들은 이제 뇌질 왕가의 신하들이 아니라 고구려 고씨 왕조의 신하들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네. 알겠는가?”

“.......”

박지가 끼여 어색해진 자리도 어쨌든 술을 권커니잣커니 하면서 취기로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술동이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후누가 창밖을 보며 뚜벅 말했다.

저길 보시오. 희한하게도 겨울나무 꼭대기에 까치집 하나, 까치감 한 개가 남아 있군요.”

후누의 말에 모두들 창밖을 보았다. 과연 어둑신한 하늘 아래 감나무 가지에 까치집이 하나 걸려있고, 그 위에 빨간 감이 하나 달려 있었다. 모두들 그 풍경을 보며 신기해하는데 박지만은 취기가 싹 가시는 듯했다. 박지는 눈을 가냘프게 뜨고 고개를 외로 틀며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희한하게도 겨울나무 꼭대기에 까치집 하나, 까치감 한 개가 남아 있다?’

후누의 말은 항간에 떠도는 유언비어와 괴소문과 비슷한 말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놈들을 내칠 수 있는 결정적인 정보다. 면종복배하는 놈들, 내가 감옥에 갔을 때 면회 한번 안 온 놈들, 이놈들이 겉으로는 억지로 광개토대왕 만세를 부르고 있지만 뭔가 구린 냄새가 나.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감찰하고 특히 후누와 수경의 밑두리콧두리를 잘 살펴보리라.

 

고구려 도읍 국내성과 왕궁인 환도성은 늦가을 비에 스산하게 젖어 있었다. 태자가 태어날 때 환도성에 넘치던 웃음소리와 황금나팔소리는 쥐 죽은 듯이 사라지고 도읍 국내성은 태자의 병 때문에 바다 밑처럼 큰 수심에 잠겨 있었다. 건강하고 늠름하게 태어나 무럭무럭 잘 자라던 거련이 갑자기 원인모를 병에 걸려 몇 달 째 밥도 먹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비에 젖은 까마귀 떼가 성벽에 줄지어 앉아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아무리 돌을 던지고 활로 쏘아 쫓아도 까마귀 떼들은 잠시 물러가는 듯 하다가도 다시 날아와 제자리에 앉아 까욱까욱 기분 나쁘게 울고 있었다.

우리 병사들이 가는 곳마다 태양의 광휘를 번쩍이며 승전보를 알리던 고구려의 국조 까마귀가 아니더냐. 그런데 지금은 흉조가 되어 환도성이 온통 까마귀의 소리로 뒤덮이다니. , 삼족오의 눈부신 날개 짓이 그립구나.’

태왕은 죽어가는 아이를 안고 하릴없이 눈물만 흘렸다.

거련아, 구수한 밥 냄새, 국 냄새가 좋지 않느냐. 한 숟갈만이라도 먹어보지 않겠니. 이 냄새를 맡고 멀리서 골목강아지 주막강아지까지 뛰어오는데 너는 어찌 밥을 외면하느냐.”

시의가 처방한 약을 아무리 먹여도 아이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고 그예 토사곽란까지 하며 의식을 잃어버리자 태왕(광개토호태왕의 약어)은 진노했다.

태왕은 시의와 내약서 의원과 약사를 잡아오게 했다.

네 놈들은 어린 아이에게 침을 찌르고 쓴 탕약을 억지로 먹여 병을 더욱 악화시켜 의식마저 잃어버렸다, 돌팔이 같은 놈들!”

태왕은 시의의 목을 베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내의와 약사들을 모두 뇌옥에 가뒀다.

태왕은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제천의식 동맹을 주관하는 국무 신녀를 불렀다.

신녀는 들어라. 이 아이를 살려내라. 만약 아이를 살리지 못한다면 너와 너희 무녀들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이미 시의가 태왕의 칼에 죽은 것을 아는 무녀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미친 듯이 굿판을 벌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무녀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담고와 제고를 두드렸고 신녀는 맨발로 작두 위에 올라 방울과 신칼을 정신없이 흔들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신녀가 작두를 타다 접신을 한 뒤 갑자기 신칼로 태왕의 목을 겨눴다.

무엄하다!”

태왕이 칼을 빼 천신녀의 신칼을 막으며 말했다.

신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꺽쉰 남자의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놈, 나는 동명성왕 추모다. 당장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태왕은 반신반의하며 보좌에서 내려와 신녀 앞에 엉거주춤 섰다.

신녀가 신칼로 광개토의 미간을 겨누며 말했다.

너는 무고한 생명을 함부로 죽여 무수한 원혼을 만들었다. 네가 흘린 피는 너와 너 자손에게 대대로 돌아갈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신녀가 시조 동명성왕의 목소리로 공수한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무릎을 꿇으려던 태왕이 오히려 발딱 일어서며 신녀를 꾸짖었다.

신녀는 진정 동명성왕을 몸주신으로 받아 공수하고 있는 것인가? 내 비록 성왕께 제사를 게을리 한 건 사실이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방을 에워싼 적들과 싸워 피를 흘린 게 어떻게 무고한 피란 말인가.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나와 내 부하들이 죽고 고구려 사직도 망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나라를 세우시느라 피를 흘리신 시조 대왕이 나의 사정을 더 잘 아실 터, 그런 말씀을 하실 리 없다!”

태왕이 부인하자 신녀가 다시 신칼을 들고 작두를 타다 갑자기 경련과 함께 몸을 뒤틀며 쓰러졌다.

잠시 후 신녀가 일어나 어린 애동의 목소리로 울었다.

응애응애, 응애응애.”

사람의 애간장을 파고드는 듯한 아기 울음소리였다. 신녀가 울자 침상에 누워 있는 거련도 따라 울었다. 환도성은 높고 앳된 아이의 울음소리로 커다란 울음터가 되었다.

이윽고 신녀의 입에서 어리고 새된 목소리로 원한에 사무친 말이 나왔다.

담덕(태왕의 아명) 네 이놈, 나는 거련이 세상에 나온 날, 함께 죽은 가야왕 하령의 아이다.”

광개토는 그제야 신녀의 말에 놀랐다. 그는 하령의 갓난아이를 죽여 가야의 대가야의 종통을 끊은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더욱이 황후가 회임하고 있는 마당에 갓난아이를 죽게 한 것이 자신의 아이에게 동티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늘 께름칙했다.

내 목을 치고도 네 아이가 무사할 줄 알았느냐? 나의 원혼이 네 아이의 목에 붙어 숨통을 눌러 죽일 것이다.”

그건 절대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야 내 아이가 살 수 있는가?”

당장 칼을 버리고 내 앞에 무릎을 끓어라! 그리고 큰 해원굿판을 벌어야 아이가 살 수 있다.”

신녀가 신칼을 태왕의 코 앞에 흔들며 호통 쳤다.

시조 동명성왕의 혼령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완강한 그였다. 광개토는 부왕 소수림대왕이 붕어한 후로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천하의 지존이었다.

하지만 태왕은 자식의 생명 앞에서는 장검을 던지고 신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녀여, 부디 해원굿으로 원한을 풀고 저 가여운 아이만은 살려주시오.”

태왕이 고개를 숙이자 이슬이 떨어졌다. 그의 생애 단 한 번도 흘린 적 없는 눈물이었다.

 

광개토대왕은 한 계절이 지나고 봄이 오자 처음으로 소후궁을 찾았다. 그동안 거련의 병 때문에 소후궁을 찾을 경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녀와 무당의 해원굿 때문인지 거련의 병세는 호전되었고, 내일 떠날 비려 원정을 앞두고 가야에서 올라온 여옥을 만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태왕은 소후궁에서 여옥을 만났다.

여옥이 태왕을 외면하며 차갑게 말했다.

야심한 시각에 어인 행차이십니까?”

소후와 함께 밤길을 걷고 싶어 왔소.”

내일 비려 원정이 있다고 들었는데 미천한 여자와 산책할 만큼 한가하지 않을 텐데요.”

어쨌든 가야에서 일어난 일들은 미안하오. 이제 고구려 왕궁으로 왔으니 한 식구가 되어 잘 지냅시다.”

“......”

여옥은 가야궁의 대정전 앞에서 하령왕의 척족들이 꽃잎처럼 목이 떨어지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해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헌데 가족을 살생한 이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식구가 되어 잘 지내자고 하는구나. 권력이란 무자비하면서도 참으로 뻔뻔한 것이다.’

태왕은 여옥을 소수림의 숲으로 이끌었다. 소수림은 부왕의 업적을 기려 이름을 붙인 고구려의 숲이다. 고원에 있는 평지로 삼림이 우거져 말을 타고도 전렵(사냥)이 가능한 곳이어서 왕실에서 자주 이용하는 사냥터였다. 그 한 가운데 석축으로 쌓은 거대한 점성대가 있었다.

태왕이 밤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고구려 별들이 너무 맑고 밝지 않소?”

“......가야의 별밤은 이보다 훨씬 더 아름답지요.”

여전히 가야를 잊지 못하나 보군.”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구릉으로 머리를 둔다는데 사람이 어찌 자기 고향을 잊겠어요.”

여옥은 오늘밤 이 순간을 위해서 그 숱한 모욕과 혐오감을 참으며 가야에서 고구려로 올라와 진드기처럼 소후방을 지켰다.

태왕은 소수림 숲에서 점성대로 난 길을 걸으며 말했다.

그래서 가야가 보이는 곳에 그대와의 특별한 신방을 꾸며 놓았소.”

태왕은 여옥과 함께 계단을 올라 점성대 꼭대기에 있는 관측대로 갔다. 망통을 들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던 천문박사와 시녀들이 태왕과 소후를 맞아 주었다. 천문박사는 태왕에게 기분 좋게 이번 원정의 승리를 점쳐준 뒤 시녀들과 함께 점성대에서 내려갔다.

둘은 관측대에 신방으로 꾸며진 침실에 들어갔다.

침실은 작지만 아담하게 꾸며졌다. 침실 벽면 고구려의 천산대렵도와 도자기로 꾸며져 있고, 하얀 물비단이 드리워진 침대는 흑단목과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가문의 원수와의 첫 날 밤을 거역할 수 없는 자리로 뻔뻔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태왕과 여옥은 식탁에 마주 앉아 밀랍에 불을 붙여 화촉을 밝혔다. 태왕이 장경호에 담긴 곡아주를 두 개의 작은 오리고배에 따랐다.

곡아주는 고구려의 술이고 장경호와 오리고배는 가야의 도기그릇이오. 먼저 식탁 위에서 고구려와 가야가 만나고 있소. , 우리의 새로운 만남을 위해 건배!”

태왕이 고배를 들고 건배를 청하자, 여옥도 흔쾌히 술잔을 들었다.

그래, 광개토, 오늘밤을 네 놈의 마지막 날로 만들어 주마.’

술잔이 비워지고 여옥의 볼이 붉은 자두처럼 발그레했다.

정녕 아름다운지고.’

태왕은 천하를 두루 다녔지만 여옥과 같은 미인을 보지 못했다.

여옥의 귀걸이가 창밖에 휘영청 걸려 있는 달빛에 흔들거리며 반짝였다. 황금빛 굽은 곡옥 귀걸이였다. 타래머리에 꽂은 소후의 봉잠도 별빛에 가늘게 흔들거렸다.

, 오늘밤은 가야여인이 고구려여인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구나.’

태왕이 여옥에게 말했다.

소후, 참으로 아름답소.”

그가 여옥의 어깨를 잡자 여옥은 건드리며 잎을 닫는 미모사처럼 몸이 움추려졌다. 패전의 전리품이 되어 머나먼 곳으로 끌려온 몸이 지아비와 척족을 죽인 원수와 첫날밤을 치르게 되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아직도 날 원망하오? 이제 가야 하령의 여인에서 짐의 여인이 되어주오.”

하령왕은 잊을 수 있어도 가야의 하늘과 땅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대와의 신방을 환도성에서 제일 높은 이곳 점성대 꼭대기에 차린 것이오. 저길 보시오.”

태왕이 가르친 곳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난 창 중 남쪽 창이었다. 밤이지만 남쪽 창으로 눈맛이 시원한 하늘이 열려 있었다.

고향 가야가 보이오?”

삼천리나 떨어진 머나먼 곳인데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내 눈에는 대가야와 소가야, 금관가야와 아라가야, 열두 가야가 다 보이오. 난 이곳에서 신안으로 사해에 펼쳐 있는 고구려의 땅과 신민을 다 보고 있소. 남창으로 가야, 백제, 신라와 왜를, 북창으로는 숙신과 거란을, 동창으로는 동부여와 동예를, 서창으로는 요동과 연을 내려다보면서 사해 신민을 다스리고 있소.”

여옥은 광개토가 여자 앞에서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다. 그래, 네 명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앞에서 맘껏 허풍을 떨고 잘난 척을 해보렴.

저는 폐하처럼 신안은 없지만 소후궁에서 심안으로 가야산과 낙동강, 그리고 가야궁을 보곤 합니다.”

여옥은 가야궁에서 태왕의 칼에 참수당한 남편 하령과 수많은 척족들이 눈에 밟혔다. 자기 앞으로 굴러온 하령의 부릅뜬 눈과 품계석을 강처럼 적시던 가야의 핏물을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의 품처럼 다정하게 품어준 가야의 산하와, 가야 사람들이 선명하게 비쳤다. 멀리서 가냘프고 애상한 공후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속눈썹이 잔잔하게 떨리더니 그예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심장에서 올라온 복수의 눈물이었다.

여옥이 흘린 눈물방울이 가야 왕후의 옷깃을 적셨다. 둥근 옷깃의 홍포 저고리와 사과꽃빛 주름치마는 이슬을 머금은 동백꽃 같았다.

그래, 나는 오늘밤만을 기다려왔다. 천하가 무력으로 잡지 못한 이 강력하고 절대적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여 복수하리라!’

태왕이 여옥의 옷을 벗기자 그녀는 고개를 외로 숙이며 몽실한 젖가슴을 두 손으로 가렸다. 하얀 고쟁이밖에 없는 그녀의 알몸은 아담하지만 늘씬했다. 그녀의 체향은 죽순 밭과 대나무 숲을 지나온 바람처럼 청신했다. 태왕의 등줄기에 잔소름이 돋으며 아래쪽이 움틀 했다. 태왕도 옷을 벗고 여옥을 침대로 이끌어 눕히고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여옥의 하얀 속살은 가야의 곡옥처럼 반질하고 매끈거렸다. 여옥은 송충이와 민달팽이 같은 벌레 수 백마리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태왕이 고쟁이를 벗기려 하자 여옥이 까실한 태왕의 손을 물리치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고쟁이에 안쪽에 단 주머니에 은닉한 은장도를 재빨리 꺼내 태왕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