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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가요산책 35> 백야성의 못난 청춘

작성일 : 2021.01.23 08:49

 

백야성, 못난 내 청춘

 

/이승주 시인

 

 

 

누구를 원망해 이 못난 내 청춘을

분하게도 너를 잃고 돌아서는 이 발길

야속타 생각을 말자 해도

이렇게 너를 너를 못 잊어 운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부디 부디 행복하여라

 

쓰라린 이별에 사랑을 빼앗기고

돌아서는 발길 위에 떨어지는 이 눈물

무정타 누구를 원망하랴

이제는 너를 너를 찾지 않으마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부디 부디 행복하여라

 

 

누구나 한번쯤 쓰라린 이별에 사랑을 빼앗기고눈물 떨구어 본 적 있으리라. “못난 내 청춘을자학하며 한순간이나마 분함에 누구를 원망해 본 적 있으리라. 그러나 야속타”, “무정타한들 누구를 원망하랴. 결국에는 사랑을 지키지 못한 나의 못남 탓이거늘. 누구를 원망할 수 없다면 어쩌랴, 나를 설득하고 너를 못 잊어도 눈물을 떨구며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다음으로 쓰라린 자책과 눈물로 나를 용서하는 것밖에. 그리고 아직도 못 잊어 내가 우는 를 축복하는 것밖에. 세상이 무정하여서이지 어찌 사랑이 무정하여서일까, 네가 무정하여서일까. 그러므로 이렇게 너를 너를 못 잊어 운다하더라도 그 빼앗긴 사랑의 쓰라린 이별의 종착점은 누구에 대한 원망이기보다 못다 한 사랑에 대한 축복이어야 하리. 이제는 다시 너를 찾지 않으마, 부디 부디 행복하여다오.

 

내 인생에 백야성의 못난 내 청춘이 노래를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는 이 노래 말고도 잘 있거라 부산항」 「아메리칸 마도로스」 「항구의 일번지같은 백야성의 노래를 무척 즐겨 부르셨다. 백야성처럼 노래 마디마다 구비 구비 애절함이 깊었다. 단언하건대, 내가 일찍이 비련과 애틋함, 진정과 절절함을 익히고 흘러간 가요를 여태껏 그리 좋아하였던 것도 다 흘러간 우리 가요를 애창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 내가 잠든 사이에 솜씨 좋게 방패연을 만들어 주셨고 멋진 썰매를 만들어 주신 아버지.

아스라한 유년의 기억 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뺨에 맵다. 가을걷이도 한참 지난 눈 쌓인 빈 들에 달빛 차갑게 식은 서리가 내린 새벽, 아직 어린 나는 바쁜 걸음으로 아버지를 뒤따라 논둑길을 걸어가고 있다.

 

벽시계소리 싸락 싸락 눈 쌓이는 겨울밤

보채는 아이를 재우려 등에 업고

희미한 방안을 거닌다

한동안 잠들지 못하고 칭얼대다

아이는 겨우 잠이 들고 나도 모르는 새 나는

싸락 싸락 눈 쌓인

달빛 차갑게 서리 내린 논둑길을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걷는다

간도(間島)의 바람도 동란(動亂)의 바람도

아버지의 등 뒤에서는 불지 않는다

꼭두새벽 흰 눈 덮고 잠드신 할아버지 뵈오려

논둑길 밭둑길 따라 돌아 나란히 걸어간 발자국, 발자국 밟으며

달빛 차갑게 서리 내린 방안을 걷는다

방안엔 밤새 혼자 걸어간 발자국

이승주, 혼자 걸어간 발자국

 

왠지 산다는 것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고단하고 마음 허해질 때, 세상의 한파에 베인 마음이 아프게 시려 올 때, 사랑도 명예도 부귀도 인생도 모두 다 부질없고 덧없다고 느껴질 때, 더러는 혼자서 백야성의 못난 내 청춘을 부른다. 부르다 보면 어느새 아버지가 생각난다. 커다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백야성의 노래가 텅텅 방안을 울리고, 따라 부르시는 아버지의 노래가 마음을 울린다. 몇 번 부르고 나면 유년의 기억이 따스한 난로의 열기로 시리고 허한 마음을 덥히고 채운다.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백야성도 돌아갔다. 불러도 불러도 줄어들지 않는 정한(情恨)이 가득한 독이요,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던, 노래와 한 몸 그 자체이던 남인수, 고운봉, 이난영, 백년설 등등 한국가요사에 불멸의 주옥같은 노래를 남겨놓고 그 많은 가수들도 돌아갔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나.

 

돌아보면, 가요는 나의 벗, 나의 사랑, 나의 인생. 내가 이승을 떠날 때 단 하나 가져가고 싶은 것을 묻는다면 그것은 흘러간 가요. 나의 넋이 이승을 하직하고 다시 천지로 돌아가는 중일 때라도 초혼(招魂)의 삼창(三唱)처럼 흘러간 가요, 트로트를 듣게 된다면 노래에 대한 못 다한 사랑과 미련으로 발걸음을 돌려 다시 이승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