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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다

<가요산책 33>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작성일 : 2021.01.09 09:41

하수영,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이승주 시인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미운 투정 고운 투정 말없이 웃어넘기고

거울처럼 마주보며 살아온 꿈같은 세월.

가는 세월에 고운 얼굴은 잔주름이 하나 둘 늘어도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나 하나만 믿어온 당신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가사가 쉬우면서도 울림을 주는 까닭은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진정성이 내 마음과 다름없이 가슴마다 와 닿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부부는 서로 빚을 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꿈같은 세월”, 늦잠을 깨우는 아내의 도마소리에도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의 팔 할은 아내의 땀방울의 몫이다. “거칠어진 손마디야말로 여민 옷깃으로도 막을 수 없이 파고들던 바람찬 삶의 무게와 부하를 견디며 손에 물마를 날 없이 열심히 살아온 증거. 그 손을 살며시 잡아 본 순간, 섬섬옥수가 수세미가 될 때까지 호사 한번 시켜주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너무나도 미안함과 안타까움이란.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 연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 하여 그만두고 / 나이 쉰 셋 /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에 부리고 / 여의도 성모병원 1205/ 1번 침대에 누워 /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째 /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까치마늘 같던 발아! / 연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 지금은 진흙밭에 삭은 연 잎새 다 된 발아. /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연 잎새 속에 숨은 민달팽이처럼 / 너의 피를 먹고 자란 시인, 더는 늙어서 / 피 한 방울 줄 수도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 부질없는 시를 쓰는구나.

 

, 하느님 / 이 덧없는 말의 교예. / 짐승의 피! / 거두어 가소서.

송수권, 아내의 맨발1 -蓮葉에게

우리 시문학사에 가족을 노래한 작품 중에서 아내를 노래한 작품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딸에 비해서 적은 편인데, 위 시 역시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내, 연엽에 바치는 절절한 사부곡(思婦曲)이다. “까치마늘 같던 발이 어느새 지금은 진흙밭에 삭은 연 잎새 다 된 발을 보며 연 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 너의 피를 먹고 자란 시인으로 이제는 그녀보다 더는 늙어서 / 피 한 방울 줄 수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 부질없는 시를 아내에게 바칠 수밖에 없는 시인의 무기력함과 안타까움이 인간의 마음을 울린다.

지금의 나 또한 아내의 땀방울과 기대에 못 미치는 시인으로, “아내는 새 집을 장만하러 일찍 출근한다. / 아내는 조그만 가게를 갖는 것도 꿈이다. // 나는 퇴근 땡 하면 / 유치원에 들러 아이 데리고 / 아내보다 먼저 귀가한다. / 이전에 아내가 하던 것처럼 / 어질러진 아침의 식탁을 수습하고 / 아내를 기다린다. / 아내는 어두워져서야 돌아온다. // 식구들 모두 잠든 밤 / 아내는 꿈속에서 / 한창 공사 중이다. / 새로 집을 꾸미고 / 가게의 시멘트 바닥을 / 연마기로 고르고 있다. // 밤낮으로 저러다가 큰일이라도 날까 / 그게 걱정스럽고 미안스러운 나는 / 잠을 깨어”(이승주, 아내는 공사 중중에서) 비록 한 돈의 은가락지도 되지 못하는 이런 시라도 짓지만, 거울을 마주보듯 우리 서로 닮아가며 꿈같은 세월을 살아온 아내여, 선한 큰 눈을 들어 나를 보아요. 천년만년 내 눈이 아직도 밝아 당신 눈 속의 첫 마음 볼 수 있고, 천년만년 내 귀가 아직도 밝아 당신 사철 꽃잎 피는 소리 들을 수 있고, 천년만년 아직도 나는 당신을, 나 아니면 아무도 당신을 돌봐 줄 사람 없다고 생각하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