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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더께 아홉 – 오만과 갈등,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후기 시절
작성일 : 2020.12.27 11:06 수정일 : 2021.01.03 08:19
서양화가 예유근의 시간 기억
-기억의 더께 아홉 – 오만과 갈등,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후기 시절
난 늘 궁금하다.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그리고 만약 우주에 끝이 있다면, 그 끝 너머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세상의 끝 너머 존재하지도 않는 우리들 인생의 행로처럼 못 가 보았지만 가보고 싶은 길, 파랑새에 대한 회한은 가봐야 알 수 있을까?
조소실에는 정발장군 동상제작을 하고 계시던 한인성선생님이 “자네는 노는 시간만 좀 줄이고 작품에 매진하면 좋은 조각가가 되겠다”면서 조각전공을 권유했으나 나는 노는 만큼 그림도 열심히 하고 있다며 건방지게 항변하며 대들기도 했다. 조각전공에 대한 생각은 아예 없었으며, 나름 부산미술대전과 서울의 공모전 등과 동인전에 출품한다고 화실에서 엄청 그림을 그렸다. 부산대학교 교지인 <효원>지 표지화에 게재하기 위해 부적을 변형한 문자 추상같은 100호 작품도 제작했다. 기바리형님(연예인. 동래고48회)이 주선한 동문신입생 환영회 무대장식 일과 학교 여러 축제 행사 장식일도 챙겨주셔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고교 동기 박태일(시인, 전경남대학교교수)과 각별히 친하다 보니 문학하는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 덕에 매해 본관 앞 교정에서 열리는 국문과의 시화전의 작품을 도맡아 밤새워 수 백점을 제작하기도 했다. 공모전도 새로운 형상성을 기치로 내세운 제1회 중앙미술대전에 출품하러 간 김에 서울에 가서 정광화(서양화가), (고)조현부(공예가)도 겸사 만나보곤 했다. 출품작은 입선을 했지만, 작품을 실고 고속버스로 서울로 다니는 일이 힘들고 허망하기만 했다. 그 후로는 서울의 공모전과 특히 시끄러운 국전에는 출품을 해본 적이 없다.
77년 6월 늘 작업에 매진하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 동료(안창홍, 예유근, 정철교, 한용식)네명은 각자 입시학생들을 지도하는 화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서로 비슷한 꿈을 꾸다가 어렵사리 의기투합하여 동인을 결성하고 전시를 실행하였다. 네 명 모두 한 결 같이 경제적으로 허덕였지만 뜻을 같이 했다. 동인 네 명에게 동의를 구한 다음, 동인이름을 음가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고,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는 의미로 “기류(基流)”라 내가 짓고 그 해 6월 <기류창립전>을 미화당백화점 앞 부산현대화랑에서 가졌다. 서문에는 젊은 열정만은 가득하여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것이 새로운 것인지, 뜻이 있는 일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내적인 희열을, 외적인 영광을 가져다 줄 런지를 아직 절실히 실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작업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준다면 우리의 길이 조금은 외롭고 삭막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소 치기어린 내용이지만, 우리의 작업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글의 내용대로 젊은 작가로서 진지한 자세로 내 딛는 첫 발걸음 이었다. 전시는 포인트현대미술회 등 선배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진3)
학교 수업을 마치는 대로 주 삼일은 (고)김종근(서양화, 전 교육대교수, 초대시립미술관관장)선생님 장전동 댁 2층 화실에 대학입시생에게 실기지도를 하러 다녔다. 특히 그림에 대한 열정 가득한 학생으로 실기력도 뛰어난 김남진(서양화가), 박재현(설치미술작가), 이상윤(미술교사) 등도 그때 만나 이 인연은 평생 진행 중이다. 어느 날, 수업 중에 김종근선생님께서 잠시 나를 불러 파리에 거주 중이며, 평소 교류하던 김창열선생님으로 부터 선물 받은 작품이라면서 편지와 함께 보내온 낙엽 위에 그려진 작은 물방울 작품 한 점을 보여주셨다. 빨간 낙엽 잎사귀 위에 그려진 조그만 물 한 방울! 아~ 아! 얼마나 영롱하게 반짝이며 귀금속같이 빛이 나든지...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김창열선님의 작품은 전시 때 많이 보아온 터이긴 하지만 캔버스가 아닌 낙엽위에 그린 발상이 나에겐 충격이었다. 조그만 한 잎 낙엽의 빨간 바탕에 대조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처럼 반짝이는 그 물 한 방울은, 정성으로 마음을 담으면 작은 작품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지금 그 작품은 어디로 갔을까? 부스러지고 없어져 버렸을까? (고)김종근선생님도 돌아가셔서 안 계신 이 때, 낙엽 따라 가버린 물방울. 이미 낙엽 속으로 스며들어 말라 사라져 버렸을까?
저녁 틈나는 시간에는 후배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가능한 많이 어울렸다. 어딘지 눈이 깊어 외로워 보이나 강단이 있어 보이는 부산대신문사 기자였던 늦깍이 후배 강선학(미술평론가, 전부산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복서로 유명한 부산대신문사 삽화기자였던 (고)고서경(미술교사), 후배 홍순명(서양화가), 홍순관(가스펠가수), 김미진(미학, 홍익대교수), 하용석(서양화가), 김남진(서양화가), 허태명(판화가, 부산예술고교장), 성실한 실력파 최봉수(도예가, 전경남대학교교수)와 그리고 전광수(도예가, 부산교육대학교교수) 등과는 화실을 오가며 자주 어울렸다, 특히 홍순관(가수)은 모임이 있을 때 마다 특유의 부드럽고 호소력 있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라 노비아>를 어찌나 잘 부르던지...
하루는 부산대신문사 4칸 시사만화를 연재하는 헐크 같은 몸을 지닌 (고)고서경(미술교사)이 연산동 내 화실로 놀러왔다. 그의 그림은 사실주의 아카데미즘에 빠져있던 학교수업 방식에 다소 회의에 빠져 애니메이션 비슷한 화풍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교내전에 <이카로스의 추락>이라는 명제로 이카로스의 날개가 불이 붙어 땅으로 떨어지는 아주 노골적인 상징주의적 형상작품으로 당시에 어울리지 않은 만화적인(팦아트) 그림을 선보였는데, 나는 강렬한 그 작품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내 동기인 예쁘고 똑똑한 k양을 엄청 좋아해서 미친 듯 짝사랑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마음이 전달이 안 되어서 엄청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가 내 화실로 찾아 온 것은 내가 좀 사랑연결 역할을 해줄 수 없을까 해서 부탁 겸 하소연하러 온 것이다. 당시 그는 학교에서 본관 앞 잔디밭에서 전교생을 상대로 복싱대결 도전을 받아주고 공개 시합하는 일로 유명했었다. 전교생중 도전해서 그를 이긴 학생은 없었다. 워낙 주먹이 세고, 덩치도 크고, 몸의 근력이 좋아 웬만큼 마셔도 잘 취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둘이서 사랑문제로 의기투합해 좀 술을 거나하게 많이 마셨다. (고)고서경이 실연감에 소주병 채로 손에 들고 벌컥거리며 마시다가 앉은 자리 그대로 뒤로 자빠져 바닥에 뻗는 순간에 ‘쭈우~악’ 하며 큰 소리를 내며 대자로 땅바닥에 드러누워 기절을 해버렸다. 그 큰 소리는 허벅지가 너무 굵어 딱 붙은 가랑이 사이 바지가 크게 찢어진 소리였다. 찢어져 벌어진 바지 사이로 순간 보니 하얀 엉덩이 속살이 그대로 보이는 노팬티 차림이었다. 그나마 머리를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음날 연산동 내 화실에서 함께 자고 난 후 아침에 일찍 깨어나 실과 바늘로 바지를 꿰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서글프기도 하였지만 그가 그린 작품 <이카로스의 추락>이 불현듯 떠올라 ‘저 친구는 분명 큰 화가가 되겠다!’고 강하게 느꼈다. 재학시절 돈을 벌기 위해 포장마차도 운영했던 그는 어느 날, 깊은 사정을 알 수 없지만 농약을 먹었다. 워낙 건강한 몸 때문에 다시 건강을 찾았지만, 그 후 상경해서 신춘문예를 준비하다가 관악산 근처에서 죽음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게 기대했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의외로 꿈같은 청춘의 아까운 나이에 그렇게 세상을 버렸다.
졸업을 앞두고 교생실습은 부산대 담하나 너머 학교인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갔다. 그 곳에서 지도교사로 뵌 분이 송영명(서양화가, 전부산예총회장)선생님이다. 학생들은 단발머리스타일의 송영명선생님을 ‘송마담’이라 별명을 불렀다. 자상하며, 섬세하신 선생님은 인기도 좋았으며 석류나 모과 등 목가적인 정물이나 인물, 풍경을 주로 그렸다. 국전에도 수상을 많이 하였으며 서정적인 그림은 지금도 유효하게 지속적으로 하고 계신다. 송선생님으로 부터 한 달간 교생실습을 제대로 찐하게 받은 인연은 송선생님이 2007년 27대 부산미술협회 이사장으로 할 때 나는 부이사장으로 함께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부산의 미술관계 행사에 당연직으로 계셔서 부산비엔나레이사회 뿐만 아니라 다른 모임에서도 지금까지도 자주 뵌다.
78년, 도시 곳곳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라는 그럴듯한 구호가 붙어 있었다. 학도호국단에는 언 듯 보아도 학생이 아닌 티가 물신 나는 경찰프락치들이 상주하였다. 교정 운동장에는 어깨동무로 스크럼을 짜고 독재타도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졸업을 앞두고 곧 군대에 입대해야 할 막연하고 암울한 현실을 빠져 나오지 못한 나는 광복동입구의 무아 음악실에서 가끔 죽치기도 하며, 송창식의 신곡발표회, 동주여상 강당에서의 윤형주, 김세환의 공연을 보러 다녔다. 가을엔 실기실에서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위에 또 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루루루루...’ 송창식의 <날이 갈수록>을 그냥 계속 불러댔다. 어쩌면 그림그리기 보다는 기타나 치면서 그냥 노래를 더 많이 불렀던 것 같다. 그해 겨울 졸업작품전의 작품은 구겨지거나 찢어진 하얀 천 조각 또는 구겨진 하얀 종이를 확대해서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과, 드러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형상이 하얀 공간속으로 사라지는 작품을 출품하였다. (사진2)
그 당시에 부산의 미술대학에서는 대학원 과정이 아예 없었다. 계속 공부는 하고 싶어 서울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에 응시해서 홍대출신 6명 외 타 대학 출신으로는 어렵게 나 혼자 합격했다. 졸업식 전에 제1기 방위로 복무(사연은 길다)하러 입대하여 해운대 신병교육대 훈련소(현 해운대신도시)으로 들어가서 겪은 고생은 군대에 대한 환멸만 가득 찼다. 졸업식은 훈련소에서 하루, 특별 휴가를 보내주어 치를 수 있었다. 가족, 그리고 친구 구철수(사회복지회관장), 정철교(서양화가), (고)이갑재(시인, 소설가), 박성원(전미술교사) 등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 오만과 갈등의 시간과 함께, 대학시절의 치열했던 사랑과 청춘은 그렇게 가버렸다. <계속>
(사진1) 1977년. 기류창립전 때 내 작품과 모습 (사진2) 1978년. 졸업작품전 때 내 작품과 모습
(사진3) 1977년 기류창립전 자료

